지난해 5월 리투아니아의 화가 민다우가스 보나누가 빌뉴스의 한 식당 외벽에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다. 빌뉴스/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의 ‘비선 라인’을 구축하려는 비밀회동이 올해 초에 열렸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3일 보도했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인도양의 이름난 휴양지인 세이셸에서 진행된 이 비밀회동을 조사하고 있어, ‘러시아 스캔들’ 파문은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신문은 미국과 유럽, 아랍의 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트럼프와 푸틴의 ‘비선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주선으로 푸틴의 측근 인사와 미국의 ‘전쟁 기업’ 블랙워터의 설립자인 에릭 프린스(47)가 트럼프의 취임(1월20일)을 앞둔 지난 1월11일부터 이틀 동안 세이셸에서 만났다고 보도했다.
비밀회동을 주선한 이는 아랍에미리트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나흐얀 왕세자 형제였고, 프린스는 이들에게 자신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비공식 특사’라고 소개했다. 프린스는 대선 캠프나 정권 인수위원회에서 공식 직함을 갖고 활동하지 않았으나 트럼프 쪽과 매우 가깝다. 프린스는 대선 때 트럼프 캠프에 25만달러(약 2억8천만원)를 기부했고, 트럼프가 교육장관으로 발탁한 베치 디보스(59)의 남동생이다. 극우 매체 <브라이트바트>를 운영하다가 백악관 수석전략가로 임명된 스티브 배넌(64)이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출연하는 등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린스는 이라크에서 2007년 민간인을 살해해 악명을 떨쳤던 용병 기업 ‘블랙워터’의 창업자로 유명하다.
세이셸 비밀회동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랍에미리트는 러시아가 이란과의 관계를 축소시킬 수 있는지 타진해보려고 양쪽의 회동에 다리를 놓았고, 트럼프 쪽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에 대해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비밀회동에 앞서 미국 뉴욕에서는 지난해 12월 트럼프와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고위 인사들의 접촉이 있었다. 나흐얀 왕세자가 미국으로 날아가 스티브 배넌,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트럼프의 ‘실세’인 큰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만났다. 아랍에미리트는 외교 관례에 어긋나게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방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 접촉 이후 프린스가 트럼프 당선자의 비공식 대리인처럼 행세하며 나흐얀 왕세자에게 푸틴의 측근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했고, 나흐얀 왕세자도 잘 아는 푸틴의 측근이 비밀회동에 참석했다. 플린은 지난 2월 러시아 ‘내통’ 의혹으로 국가안보보좌관직에서 물러났다. 미 상원 정보위원회는 쿠슈너를 출석시켜 러시아 내통 의혹을 캐묻기로 한 상태다.
세이셸 비밀회동에 대해 프린스의 대변인은 성명을 내어 “에릭은 정권 인수위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날조된 얘기다. 그 만남은 트럼프 대통령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쪽과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어떤 접촉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에릭 프린스는 인수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한 게 없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쪽은 대선 캠프와 인수위 시절 정보기관의 사찰 의혹을 제기하며 계속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2일 트위터에 “진상은 사찰과 (정보) 유출로 드러났다. 유출범을 찾아라”라는 글을 올렸다. 정보당국이 트럼프 캠프와 인수위를 사찰하고 민간인 정보를 유출했다는 <폭스 뉴스>의 보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트위트를 날렸다. <폭스 뉴스>는 3일 오바마 행정부 때 수전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외국인 도청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입수한 트럼프 캠프와 인수위 관계자들의 이름을 정보보고서에 노출하라고 지시해, 고위 안보 관리들이 공유했다고 보도했다.
황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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