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22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의 취임선서식에 참석해 그를 격려하고 있다. 지난 1월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으로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하게 됐던 배넌은 4일 국가안보회의 참석 자격을 잃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배넌 대통령’으로까지 불리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영혼’을 사로잡은 극우 인종주의자 스티브 배넌(64)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국가안보회의(NSC) 수석(장관급) 회의에서 배제됐다. 백악관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물로 보인다. 미국 언론은 외교·안보 정책에서 허버트 맥마스터(55) 국가안보보좌관 등 군 출신들과 정보당국, 내각 관료들의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일 배넌을 국가안보회의에서 배제시키기로 결정했으며, 지난 1월 당연직 위원이었다가 이슈가 있을 때만 회의에 참석하도록 격이 낮춰진 국가정보국(DNI) 국장과 합참의장을 다시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고 5일 보도했다. 또 에너지부 장관과 중앙정보국(CIA) 국장, 유엔 주재 미국대사도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외교·안보 정책을 다시 공식적인 정부조직이 주도하도록 정상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조처가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의 영향력 확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맥마스터는 국가안보회의에서 ‘정치색’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지난 1월 트럼프가 배넌을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으로 임명하자,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안에서도 안보를 정치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극우 매체 <브라이트바트>를 운영하며 인종주의 논란을 불렀던 배넌은 외교·안보 경험이 전혀 없어 자질 시비도 낳았다.
배넌은 국가안보회의에서 배제되면 사표를 내겠다고 위협까지 했다고 백악관 관리들은 전했다. 하지만 배넌 쪽은 국가안보회의가 배넌의 뜻대로 정상화돼 그가 더는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국가안보회의의 축소를 바랐던 배넌이 전임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마이클 플린이 회의를 잘 운영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참석했을 뿐, 실제 회의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어찌 됐든 대통령의 귀를 사로잡고 권력을 얻으려는 ‘궁중 암투’가 만연한 백악관에서 벌어진 또 한편의 드라마”라고 평하며, 백악관 안팎에서 배넌의 정적들이 그의 패배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고 했다.
최근 트럼프의 맏사위인 재러드 쿠슈너(36) 백악관 선임고문은 배넌에 대한 불만을 자주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슈너는 배넌이 관료체제를 해체시키고 국수주의적인 의제를 밀어붙여 대통령한테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 고위 관리는 <폴리티코>에 “국수주의자들과 ‘웨스트 윙 민주당원들’ 간의 큰 싸움”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인 쿠슈너는 오랜 기간 민주당원이었다.
배넌은 또 게리 콘(57)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정책 의제를 두고 마찰을 빚었고, 행정부에 서로 비공식적인 권력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콘은 쿠슈너와 가깝다. 배넌이 국가안보회의에서 배제된 데는 쿠슈너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배넌의 국가안보회의 배제는 트럼프의 외교·안보 정책을 이끄는 세 집단 가운데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힘이 빠지고, 쿠슈너-이방카 부부 등 온건파 측근들과 맥마스터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강경파 군·관료 출신들의 힘이 커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배넌이 주도한, 이슬람권 출신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한 행정명령이 연방법원에서 잇따라 제동이 걸려 트럼프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트럼프가 배넌을 국가안보회의에서 배제한 이유라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의 측근들 말을 인용해, 트럼프는 자기 혼자 백악관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배넌이 “배넌 대통령”으로 불리며 마치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비판받는 데 불쾌감을 내비쳤다고 했다.
그러나 신문은 트럼프가 배넌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고 짚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저인 35%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트럼프로서는 배넌을 자신들의 투사로 여기는 국수주의자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황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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