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로세요 푸에르토리코 주지사(왼쪽)가 3일 미국 연방법원에 제기한 파산보호 신청 사건에 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산후안/EPA 연합뉴스
카리브해의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가 빚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실상의 파산보호를 연방법원에 신청했다. 미국 역사상 주나 자치령 정부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규모도 역대 최대다.
<에이피>(AP) 통신은 푸에르토리코 정부가 3일 연방법원에 채무 조정을 신청했다고 보도했다. 1230억달러(약 139조원)의 빚을 진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740억달러어치의 채권과 4900만달러의 연금 미지급액에 대해 지불 정지를 요청했다. 자치정부의 파산보호 신청 규모로 역대 최대였던 2013년 디트로이트시(180억달러)의 사례를 훨씬 뛰어넘는다.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시민들에게 실질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게 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미국의 주나 자치령은 파산보호 신청이 원칙적으로 불가하지만, 앞서 푸에르토리코는 이를 우회하는 법을 만들었다. 채권단이 2일 채권 회수를 위한 소송을 제기하자 이에 맞서려고 바로 소송을 냈다. 리카르도 로세요 푸에르토리코 주지사는 채권자들이 재정을 다 빼돌리려고 나섰다며 “우리 시민들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소송 결과는 역시 빚더미에 앉은 일리노이주나 필라델피아시 같은 다른 자치정부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채무 조정 과정에서 연금 축소 등 고통이 따르겠지만 새 출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채권단 모임 쪽의 앤드류 로젠버그는 “푸에르토리코 경제는 앞으로 몇년간 멈추게 될 것”, “아르헨티나처럼 될 것”이라며 반발했다. 푸에르토리코는 지난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미국 정부가 어떻게든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푸에르토리코 정부 발행 채권을 사들이는 이들이 이어졌다.
푸에르토리코는 2006년부터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빚이 불었다. 실업률이 12.4%까지 올라갔고, 500만명까지 기록했던 인구는 고급인력 등의 본국 이주 물결이 일면서 340만명까지 줄었다. 미국의 현지 기업에 대한 면세 혜택 종료로 기업들이 떠난 것도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채권 발행 금리 인상과 악순환 고리를 형성했다. 자치령의 재정 위기에 연방정부가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도 관심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트위터 글에서 “민주당은 유권자들 세금으로 푸에르토리코를 구제하려고 한다”며 부정적 시각을 보인 바 있다.
스페인계 등 백인 인구가 75%에 달하고 가톨릭이 주류 종교인 푸에르토리코는 여느 카리브해 섬나라처럼 ‘스페인계’라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1493년 이 섬을 ‘발견’한 이래 400여년간 스페인 식민지였고, 미국이 필리핀·쿠바·괌을 뺏은 1898년 미-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미국에 복속됐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미국 시민권을 인정받지만 미국 대통령이나 의회 선거 참정권이 없다. 이런 독특한 위상 때문에 사실상의 독립국으로도, 반대로 식민지로도 불린다.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다음달 미국의 공식 주로 편입될지를 두고 다섯 번째 투표가 진행된다. 공식 주로 편입될지, 또는 독립하거나 자치령 상태를 유지할지를 1차 투표에서 결정한다. 후자 쪽 표가 많으면 2차 투표에서 독립과 자치령 유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공식 주가 되면 연방정부에서 연간 100억달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2012년에도 주로 편입되자는 투표 결과가 나왔지만, 백악관은 투표 과정이 불투명하고 무효표가 50만표 넘게 나왔다는 등의 이유로 수용을 거부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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