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가족이 24일 바티칸 교황 관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바티칸/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는 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안 쓴 베일을 교황청에서는 썼을까?
19일 시작된 트럼프의 중동과 유럽 순방은 이슬람·유대교·가톨릭의 중심지를 모두 방문했다는 점에서 ‘성지 순례’로 불리기도 한다. 세 종교에 대한 존중과 종교 간 화합 도모가 순방의 주제 가운데 하나다.
보수성이 강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일수록 특히 여성들에게 엄격한 복장 규정을 부과한다. 사우디를 방문하는 유력 여성 인사들의 드레스 코드는 그전부터도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우디 쪽에서 외빈한테까지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한다고 보는 건 최근 상황을 볼 때 선입견에 가깝다. 다수의 유명 인사들이 현지 여성들처럼 머리를 가리는 복장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구 여성이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스카프를 쓸 때 논란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멜라니아도 힐러리 클린턴이나 미셸 오바마 등 전직 퍼스트레이디들처럼 스카프를 쓰지 않았다. 다만 평소 같지 않게 헐렁한 검은색 드레스로 발목까지 가려 나름대로 ‘현지화’된 옷차림을 했다.
그런데 24일 바티칸에서 트럼프와 함께 교황을 만난 멜라니아는 돌체&가바나 브랜드의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만틸라로 불리는 베일을 써 사우디에서보다 ‘보수적’인 패션을 보여줬다. 트럼프의 딸 이방카도 검은색 면사포로 드레스 코드를 지켰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는 교황을 알현하는 여성의 복장 규정을 준수한 것이라고 전했다. 교황청의 의전 규칙은 남자는 검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매도록 하고 있다. 여성은 검은색 드레스에 같은 색 베일을 써야 한다. 교황과 대등하게 흰색 옷을 입을 수 있는 특권은 가톨릭 군주에게만 부여된다. 본디 흰 옷은 13세기에 검약을 강조하는 도미니크수도회 출신 첫 교황 이노센트 5세가 입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교황의 지고한 권위를 상징하게 됐다.
‘복장 규정’은 최근 들어 상당히 완화됐다고 한다. 교황청이 관대해진 것도 있지만, 지위 높은 외빈들이 지키지 않은 측면도 있다. 가톨릭 국가가 아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과거 바티칸을 방문할 때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왕관 밑에 검은색 베일을 썼다. 하지만 2014년에는 자주색 드레스에 모자를 써 ‘전통’을 깼다. 자주색은 로마시대 이래 황제의 옷 색깔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교황 앞에서 권위를 세우려 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1989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부인 라이사가 붉은색 드레스를 입어 파란을 일으켰다. 가톨릭 문화권 밖의 여성들이 전통 깨기에 앞장선 셈이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20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왕궁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훈장 수여식에서 모하메드 빈 나예프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와 얘기하고 있다. 리야드/AFP 연합뉴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멜라니아는 ‘구태여’ 베일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 문화권인 슬로베니아의 모델 출신으로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멜라니아의 ‘개인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멜라니아는 교황을 만난 뒤 가톨릭 자선기관을 방문하고 성모상에 헌화하기도 했다.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면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교황과 껄끄러운 관계이던 트럼프는 이번 순방에서 시간을 30분 짜내 교황을 만났다. 가톨릭 뉴스 사이트 <위스퍼스 인 더 로지아>의 에디터 로코 팔모는 “백악관이 무시하고 싶은 마지막 대상은 바티칸일 것”이라며 “(하지만) 백인 가톨릭 신자들의 표심을 얻는 사람이 백악관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멜라니아가 베일을 쓰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멜라니아는 22일 유대교 성지인 예루살렘의 통곡의벽(서벽)을 방문했을 때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통곡의벽에 머리를 맞댈 때는 유대인들이 쓰는 둥근 빵 모양의 모자(야물커)를 써야 하는데, 트럼프와 이방카는 머리에 야물커나 모자를 썼다. 이방카의 남편 재러드 쿠슈너는 유대인이다.
사우디에서는 쓰지 않은 베일을 교황청에서만 쓴 것에 대해 문화적·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부 미국인들은 에스엔에스(SNS)에 “중동에서 스카프를 쓰는 것은 복종의 표시이고 교황을 만날 때 쓰는 건 문화의 일부냐?”, “멜라니아와 이방카는 바티칸에서 검은 아바야(무슬림 여성이 입는 검은 옷)와 베일을 착용하도록 강요받았다”며 비꼬는 글을 올렸다. 물론 멜라니아가 사우디에서 스카프를 썼다면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2015년 당시 퍼스트레이디인 미셸 오바마가 사우디 방문 때 스카프를 안 썼다고 비난한 것도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트럼프는 당시 트위터에 “사우디인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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