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으면서 혼수상태에 빠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13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렁킨공항에서 공항요원들에 의해 비행기에서 내려지고 있다.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해 윔비어를 데려왔지만, 윔비어의 상태가 알려지면서 북한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 신시내티/AP 연합뉴스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조셉 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해 1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던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22)를 13일(현지시각)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데려왔다. 미국 고위 관리의 방북은 도널트 트럼프 행정부 들어 처음이지만, 웜비어가 1년 이상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국 내 대북 여론이 악화되는 모양새다.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윤 특별대표는 지난 12일 아침 의료진 두명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으며, 곧바로 웜비어를 접견했다. 윤 대표는 웜비어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석방을 요청했으며, 북한은 이에 동의했다.
미 버지니아주립대 3학년이던 웜비어는 지난해 1월 관광차 방문한 북한의 평양 양각도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한 혐의로 체포됐으며, 같은 해 3월 체제전복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웜비어는 공개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미국을 대신해 북한에서 영사 조력을 해온 스웨덴 쪽도 웜비어를 접견할 수 없었다.
웜비어의 부모는 북한이 미국 쪽 인사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들었다며 “웜비어가 지난해 3월 북한의 법정 선고 때 모습을 드러낸 이후 1년 넘게 코마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공개했다. 그의 부모는 또한 웜비어가 재판 이후 식중독인 ‘보툴리누스 중독증’에 걸렸고, 수면제를 복용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폭스 뉴스>도 이날 “미 고위당국자가 웜비어가 혼수상태에 있다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웜비어가 정상적인 건강상태로 고향에 돌아왔다면 오랫동안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북-미 관계의 해빙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여지도 있었다. 북-미는 웜비어 등 북한 억류자의 석방을 위해 지난달부터 노르웨이 오슬로와 뉴욕 등에서 밀도 높은 협의를 벌였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북-미 고위급 인사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현안을 논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어찌됐든 이른바 ‘뉴욕 채널’도 일시적으로 가동됐다.
하지만 웜비어가 혼수상태로 되돌아오면서 이번 석방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되레 ‘악재’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우선, 여론이 너무 좋지 않다. 그의 가족들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겨우 일주일 전에 이런(혼수상태) 얘기를 들었다. 웜비어가 왕따 체제에서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취급당하고 협박을 받았는지 세상이 알기를 원한다”고 북한을 직접 비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날 사설에서 “이는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고 고립된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행위”라며 “반드시 처벌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촉구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웜비어 석방을 위해 노력해온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도 “웜비어가 혼수상태에 있었다면 북한은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웜비어의 불운한 귀환이 북-미 관계의 단기적 악재로 끝날지 여부는 웜비어의 건강과, 아직도 억류중인 미국인 3명의 석방 여부 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웜비어의 건강이 악화되면, 북핵 협상을 위한 미국의 외교적 공간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또한 웜비어가 혼수상태에 빠져든 이유가 북한의 설명대로 식중독이 아니라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처럼 가혹행위 등 때문으로 밝혀진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아직도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 국적자 김학송, 김상덕, 김동철 목사 등 3명의 석방 여부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상당히 절제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례적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웜비어 석방과 관련해 이날 성명에서 “웜비어와 그의 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추가적인 언급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웜비어의 건강상태를 설명하지도 않았고 북한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백악관도 트럼프 대통령이 웜비어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웜비어의 석방을 북-미 간 외교적 기회로 삼고 싶어하는 의도가 읽힌다. 실제 다음주 미국과 중국의 외교·국방장관이 참석하는 ‘미-중 외교안보대화’를 앞두고 양쪽은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복귀시키기 위한 사전조건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의견 교환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