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던 지난해 8월초, 백악관에는 이례적인 내용의 봉투가 배달됐다. 중앙정보국(CIA)이 보낸 봉투 안의 정보를 열람할 대상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데니스 맥도너 비서실장, 수전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에이브릴 헤인스 국가안보 부보좌관 4명으로 한정됐다. 중앙정보국의 ‘대통령 일일 브리핑’ 대상 중에서도 핵심 인사들만 열람하고, 열람 뒤 즉각 회수되도록 했다. 또 누설을 막기 위해, 이 보고 내용에 대처하는 후속 회의들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 때와 같은 보안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3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을 다룬 탐사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보도를 보면, 미국 지도부는 백악관에 전달된 이 기밀 정보를 통해 이미 러시아의 노골적 대선 개입을 파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대선에 개입하려는 사이버 공작에 직접적으로 관여됐다는 구체적인 정보였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패배시키거나 적어도 그에게 타격을 주고, 상대인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도우려는 그 공작의 대담한 목적에 대한 푸틴의 특정한 지시도 있었다.
이미 러시아 정보기관과 관련된 해커들이 1년 동안 민주당 전국위 서버를 해킹해 2만여건의 이메일을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상태였다. 연방수사국(FBI)은 관련 수사를 개시했다. 그 후 5개월간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를 응징하는 다양한 방법을 은밀히 논의했다. 기반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 푸틴을 곤란하게 하는 정보 노출, 경제에 구멍을 낼 수 있는 제재 등이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대선 뒤인 12월말에야 미온적 대처만을 발표했다. 러시아 외교관 35명 추방과 2곳의 러시아 외교 공관 폐쇄, 대선 개입에 관여된 이들만을 겨냥한 상징적 경제 제재였다.
공식 제재에 앞서 오바마는 러시아의 사회기반시설 작동을 방해하는 사이버 폭탄을 설치하는 비밀 공작을 승인하기도 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미국 대선 개입은 세기의 범죄였으나 러시아는 상응하는 보복을 받지 않았다.
측근들은 오바마가 9월에 푸틴에게 직접 경고하는 등 일련의 경고들이 투표시스템에 대한 러시아의 와해 공작 등을 막았다고 옹호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고, 이후 사건이 정치적 공방으로만 다뤄지면서 오바마 행정부 인사들 사이에서도 미온적 대처에 대한 후회가 나오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나의 정부직 재직 기간 중 가장 옹호하기 힘든 일”이라며 “우리는 숨통이 졸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클린턴의 승리가 유력했다는 점, 적극 대응이 선거 조작 시도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도 오바마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라고 전했다. 마이클 맥폴 전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는 “범죄에 어울리지 않은 응징이었다”며 “러시아는 우리 주권을 침해해 대통령을 뽑는 우리의 가장 성스런 민주주의의 행위에 개입했다. 크렘린은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번 기사를 역공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23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중앙정보국이 대선 훨씬 전에 그(오바마)에게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며 “그는 그것에 관해 어떤 조처를 해야 했다. 몹시 슬프다”며 오바마의 대응을 비판했다. 24일 트위터에도 “오바마 정부는 러시아의 대선 개입에 관해 (대선일인) 지난해 11월8일보다 훨씬 전에 알았다”며 “그에 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라고 썼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