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흑인을 지칭하던 말 ‘니그로’(negro)는 이제 공공 생활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 대신 이 표현을 쓰다간 ‘깜둥이’라고 욕한 꼴이 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빗대 니그로라는 말을 꺼낸 정치인들은 망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흑인들에 대한 호칭에서 그들의 ‘뿌리’를 찾아준 언어학자 키스 베어드(94)가 지난 13일 애틀랜타에서 별세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25일 보도했다.
뉴욕에서 고교 교사와 교육 행정가로 일하던 베어드가 ‘니그로 추방’에 나선 것은 흑인 민권운동의 본격화를 앞둔 1966년부터다. 교사들이 참석한 콘퍼런스에서 “니그로는 노예 혹은 노예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니그로는 ‘검다’는 뜻의 라틴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럽 출신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식으로 부르는데 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하냐는 얘기였다.
베어드의 사상에는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와 식민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미국을 지배하는 유럽계가 강요하고 유지시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억눌린 사회·경제적 처지는 ‘니그로’라는 저속한 호칭에 의해 상징되는 동시에 촉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대로 생각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을 창안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신념에 따라 미국 흑인 호칭을 바꾸게 만들었다.
베어드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신분으로 정착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베이도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50돌이 된 지난해 녹화한 동영상에서 제국주의에 반감을 품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일곱 살 때 학교 교장이 ‘너희들은 영국 신민들’이라고 한 말을 양할아버지에게 전했다고 한다. 양할아버지는 “(신민이 아니라) 영국의 물건이겠지”라고 말한 뒤 “나중에 누군가 ‘당신은 영국 사람이오?’ 하고 물으면 ‘아니, 아프리카 사람이오’라고 답해야 한다”고 일러줬다고 했다.
24살 때 미국으로 건너온 베어드는 카리브해의 아프리카계 문화를 연구하면서 미국 교육의 탈중앙화를 추구했다. 미국, 카리브해, 아프리카 흑인들의 연대를 부르짖는 범아프리카주의의 주창자이기도 했다. 스페인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독일어·스와힐리어(아프리카 남동부 말)·걸라어(미국 남동부 섬들에서 유럽계와 흑인 사이의 혼혈인들 말)를 비롯해 많은 언어에 능통했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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