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백악관 앞에서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DACA·다카) 프로그램 폐지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대들이 집회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5일 오전 11시30분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 라파예트공원에 모인 500여명의 시위대 얼굴엔 긴장감과 피로감이 묻어났다. 일부는 지난달 15일부터 이곳에서 철야농성을 벌여왔다. 이날이 22일째였다. 그러나 불법 이민과 추방이라는 굴레가 다시 씌워질 수 있는 이들의 몸부림을 미국은 이날 공식적으로 외면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류 미비’ 청소년들에게 한시적이나마 합법적 이민자 지위를 부여했던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DACA·다카) 프로그램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혼란과 충격을 덜기 위해 6개월의 유예기간을 둔다고 했다. 하지만 의회에서 입법 조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다카는 내년 3월5일 중단된다. 80만명의 청소년 다카 혜택자들은 이제는 고향이 된 미국을 떠나, 이젠 낯선 고국으로 추방될 위험에 처했다. 다카 혜택을 받기 위해 등록한 모든 개인정보는 자신을 추방하기 위한 칼날로 돌변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도입한 다카를 “불법적 사면”이라고 규정하며 폐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취임 뒤에는 유지할 것처럼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희망은 옅어졌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러시아 스캔들’ 등으로 흔들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반이민 전문가’인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 등을 앞세워 지지층 결집의 희생양으로 다카를 폐지했다.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DACA·다카) 프로그램 폐지에 항의하는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냉혈함을 풍자한 모형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멕시코 출신의 데이스 로페즈(27)는 시위 참석은 처음이라며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고 했다. 표정이 어두웠다. 2005년 부모를 따라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는 로페즈는 2012년 다카 프로그램 수혜자가 됐다. 시간당 임금은 8달러에서 13달러로 껑충 뛰었다. 5년 전부터는 베이비시터(육아 도우미)로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그는 다카의 폐지로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고용주가 해고를 할지, 급여가 얼마나 깎일지 모든 게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여기 있다. 미국은 나의 고향이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위 현장에는 소수인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백인들도 눈에 띄었다. 뉴욕주의 한 초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은퇴했다는 마거릿 드와이어(66)는 “내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서 수십명의 다카 학생들이 있었는데 정말 진지하고 똑똑했다”고 말했다. 드와이어는 “이들의 부모들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도 늘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위험한 삶을 살았다”며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아이를 안고 다카 프로그램 폐지 반대 시위에 참가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모여 샌드위치와 물로 점심을 때운 이들은 낮 12시30분부터 함께 모여 항의 집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여기가 머물 곳”, “다카를 보호하라”, “함께 싸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트럼트 대통령의 다카 폐지를 성토했다.
한인 이민자 권익 단체인 ‘미주 한인 봉사 교육단체 협의회’(나카섹) 회원 30여명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나카섹’이라 쓴 머리띠를 두르고 북을 치며 집회에 참석했다. 윤대중 나카섹 사무국장은 “한인 다카 수혜자들은 1만~1만5천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며 “아직 세부적 내용이 나오지 않아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추방을 면해도 운전면허증도 발급받을 수 없고, 학업도 중단해야 하며, 저임금에 시달려야 한다.
‘다카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시행하려다 각계의 격렬한 반발을 부른 ‘반이민 행정명령’ 사태의 재판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브온’ 같은 풀뿌리 단체들도 이날 반대 투쟁을 선언했다. 노조와 종교계도 적극 합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워싱턴뿐 아니라 뉴욕, 덴버, 로스앤젤레스 등 미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펼쳐졌다. 뉴욕 맨해튼의 트럼프타워 앞에도 시위대가 몰려 연좌농성을 벌이다가 3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워싱턴/글·사진 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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