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지난 22일 유엔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유엔 전체 예산의 5분의 1 이상을 분담하는 미국 정부가 내년 분담금 규모를 대폭 삭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 선언에 대해 유엔 회원국 다수가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내린 ‘보복성 결정’인 것으로 분석된다.
25일 <에이피>(AP) 통신은 유엔이 전날 2018~2019년도 예산을 전년보다 2억8500만달러(약 3066억6000만원) 줄인 53억9600만달러로 책정했다고 밝히며, 미국 정부와 유엔이 분담금 축소 협상을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미국이 전년보다 분담금을 2억8500만달러 깎기로 협상했다”며 “유엔의 비대해진 경영과 지원 기능을 줄이고, 미국 우선주의를 돕는 지원을 강화하며, 유엔 시스템에 더 많은 규율과 책임을 부여하려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헤일리 대사는 또 “유엔의 비효율성과 낭비는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역사적 지출 감소는 옳은 방향으로 가는 큰 발걸음이다. 계속해서 유엔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을 검토하겠다”며 추가 삭감 가능성도 언급했다. 미국은 유엔 정규 예산의 22%를 부담하고 있으며, 이는 2016~2017년 기준으로 12억달러에 달한다고 <뉴욕 타임스>는 밝혔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수차례 유엔 분담금 축소를 주장했다. 다만 이런 전격적 감축의 이면엔 돈줄을 조여 유엔을 길들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미국 언론들은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예루살렘 선언’ 거부 결의안에 대해 수차례 불쾌한 기색을 보였으며, 헤일리 대사는 투표 전부터 “동의하지 않는 국가의 이름을 적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지난 21일 유엔은 긴급총회에서 미국의 ‘예루살렘 선언’에 반대하는 ‘예루살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28개국이 찬성하고 9개국이 반대, 35개국이 기권했다. 헤일리 대사는 이 직후 “유엔총회가 (미국에 대한) 공격을 택한 이날을 기억할 것”이라며 뒤끝 있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 자신의 트위터에 찬성 또는 반대한 국가, 기권하거나 투표에 불참한 국가 명단을 게시했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선언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향해 “그들은 수억달러, 심지어 수십억달러를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반대하는 투표를 한다. 투표를 하게 내버려둬라. 우리 돈이 절약된다. 개의치 않는다”며 해당국에 원조를 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취임 뒤 트럼프 행정부는 전체의 28.5%를 분담하는 유엔평화유지 예산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실제로 지난 6월 미국 등의 압력으로 올해 7월부터 1년간 적용되는 평화유지 예산이 전년보다 5억7천만달러 삭감됐다.
인권단체들은 축소된 예산이 미칠 잠재적인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유엔 담당 이사인 루이 샤르보노는 “유엔에서 효율성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건 문제가 아니다”라며 “다만 인권유린을 감시하고 조사하고 폭로하는 유엔의 역할과 생명을 구하는 역할이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