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파나마시티의 트럼프 호텔에서 인부가 ‘TRUMP' 표기를 떼어내고 있다. 파나마시티/AP 연합뉴스
5일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 있는 70층짜리 고급 호텔 입구. 망치와 쇠지레를 들고 나타난 인부가 명판에서 ‘TRUMP’라는 글자를 난폭하게 뜯어냈다. 곧이어 로비에 들어선 다른 남성은 피아노를 치며 “파시즘은 승리하지 못한다”는 가사가 있는 그리스 노래 ‘아코디언’을 불렀다. 소련 붕괴 뒤 레닌 동상이 철거될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 전쟁’에서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호텔 운영권 소송에서 패하면서 벌어진 풍경이다.
소동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들이 경영하는 트럼프그룹이 운영을 맡아온 이 호텔의 건물주가 지난해 8월 바뀌면서 싹이 텄다. 트럼프그룹은 원래 2031년까지 호텔을 운영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 핀티클리스가 이끄는 미국 사모펀드가 객실 369개 중 202개를 인수한 뒤 운영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핀티클리스는 트럼프그룹이 계약과 달리 경영을 엉터리로 해 성수기인 1월에도 객실 점유율이 30% 안팎까지 떨어지면서 지분 보유자들의 손해가 크다고 주장했다.
호텔의 트럼프그룹 직원들이 사무실 문을 잠그고 퇴거를 거부하면서 지난 12일간 싸움이 격화됐다. 양쪽은 주먹다짐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수돗물 공급 중단 사고까지 일어났다. 결국 파나마 법원이 트럼프그룹 직원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고 판사와 경찰관들이 출동한 끝에 분쟁은 핀티클리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에이피>(AP) 통신은 라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트럼프 호텔이 사라진 것은 반트럼프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풀이했다. 파나마시티 트럼프 호텔은 치약 등 물품과 칵테일에까지 ‘트럼프’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업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난 여론에 영업에도 타격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이 호텔 펜트하우스를 소유한 미국인은 “트럼프가 이민 문제에 관해 하는 말과 행동이 임대 수입에 영향을 미친다”며 ‘트럼프’라는 이름을 지우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하룻밤에 1200달러를 받았지만 요즘은 118달러에 내놓는다고 했다.
그리스령 키프로스 출신인 새 호텔 주인 핀티클리스가 건물 접수 뒤 “파시즘은 승리하지 못한다”고 노래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을 조롱한 것이다. 그는 트럼프그룹을 상대로 1500만달러(약 161억원)짜리 소송도 내겠다고 밝혔다.
이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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