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8일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FP 연합뉴스
아르헨티나가 다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자국 통화 페소의 폭락과 금리 앙등 등 금융위기가 몰아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금리 인상과 달러 가치 상승으로 촉발된 것이어서, 부채가 많고 재정이 취약한 신흥국가 경제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8일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국제적인 지원이 있어야 정부가 “우리 역사에서 전에 경험했던 것들과 같은 위기를 피할 수 있다”며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아르헨티나는 페소화 가치가 지난 1년 동안 25%나 떨어지고 투매사태가 벌어지면서 최근 금리가 40%로 급등하는 금융위기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지난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금리를 33.25%에서 40%로 올렸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을 최근 8일 동안 금리를 세차례나 인상했다.
이날 연설에 앞서 마크리 대통령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와 회담에서 통화 가치를 회복하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제적인 신용 조처를 요청했다. 그는 이날 회담에서 3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아르헨티나 언론들이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아르헨티나의 구제금융 요청은 17년만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나 2001년 금융위기 때 통화기금과의 협상을 통해 구제금융을 받았다. 하지만, 그후 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구제금융 정채을 놓고 놓고 다투다, 지난 2006년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는 통화기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당시 금융위기 직후인 2003년에 집권한 좌파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드 키르츠네르 대통령 정부는 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조건인 긴축정책으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더 위축되고 있다고 반발하다가, 채무불이행까지 선언했다.
2015년 집권한 우파 마크리 정부는 12년간 좌파 정부의 보호주의 및 정부재정 확장 정책을 되돌리고, 규제완화 및 민영화 등 시장주의 개혁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전세계적인 유동성 국면이 끝나 금리가 인상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이 재발해 지난해 25%에 이르면서, 올해 들어서면서 금융위기 조짐이 일었다.
우파 마크리 정부의 시장주의 개혁이 다시 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국내에서는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키르츠네르 전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부채를 가진 나라를 물려받은 뒤 마크리는 국제통화기금의 처방에 호소해야 한다고 선언했다”며 “우리는 과거 쪽으로 미래를 바꾸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마크리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과거 정부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물려받은 엄청난 공공지출의 결과로, 우리나라가 대외 금융에 가장 의존하는 국가의 하나라는 것이다”고 말했다. 좌파 정부가 유지해온 과도한 공공분야 및 복지 지출 때문에 재정적자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아르헨티나의 사정에 현재 위기의 책임을 돌렸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고금리를 찾는 국제투자자들을 유치하려고 100년 채권을 비롯해 일련의 고금리 국채 발행을 했다.
아르헨티나는 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정책이 미친 악영향을 의식해, 이번에는 통화기금의 엄격한 조건이 부과되지 않는 ’신축적 신용라인’(FLC) 형태로 구제금융을 받으려 한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분석가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강력한 경제 기초 및 정책을 펼쳐온 국가에만 제공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콜롬비아·멕시코·폴란드에게 세 차례만 제공됐다.
통화기금의 경제분석가였던 에드워드 알-후사니는 “아르헨티나가 통화기금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나쁜 정책들을 도입한 것을 감안할 때 신축적 신용라인을 적용하는 것은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드는 것이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가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이미 진행중인 마크리 정부의 긴축정책을 더욱 강화되면, 임금삭감까지 진행될 수 밖에 없어, 과거와 같은 반발이 터져나올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 위기가 다른 신흥국이나 개도국으로 번질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제이 파월 미 연준 의장은 8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미국 금리 책정자들은 신흥시장들이 일련의 미국 금리 인상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시장 구두개입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구제금융에 돌입했다. 인접국 브라질도 헤알화가 달러당 3.56헤알까지 떨어지며 연초 대비 7.6%가 하락하며, 자금유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터키도 리라화가 국가 신용등급 강등 와중에서 지난 4일 달러당 4.28리라까지 내려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러시아 루블화도 미국발 경제 제재가 더해지며 이달 들어서만 8.9% 하락했다.
신흥국에서 금융위기 조짐이 이는 것은 미국 연준의 6월 기준금리 인상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국제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에 따른 것이다. 부채가 많고 재정이 취약한 신흥국이나 개도국의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으로 보고, 대규모 자금유출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