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수용소는? 모르는 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왼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일 베를린 총리 관저에서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베를린/AP 연합
비밀수용소 납치돼 감금·고문당한 독일인
라이스 독일 도착일에 CIA 전 국장 등 제소
‘미국 책임’ 놓고 메르켈 총리와도 불협화음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유럽 순방길에 맞춰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수용소와 관련한 논란도 달아오르고 있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에 나선 반면, 루마니아는 보란 듯 자국 내 미군기지를 두도록 협약을 맺는 등 동서 유럽의 균열도 드러났다.
독일인 오인 납치= 라이스 장관은 첫 방문지인 독일에서 ‘칼레드 엘 마스리 사건’과 부닥쳤다. 레바논계 독일인인 마스리(42)는 2003년 12월 휴가를 보내고 있던 마케도니아에서 “납치”돼 영문도 모른 채 아프가니스탄의 비밀수용소로 끌려가 5개월 동안 잔혹한 심문과 고문까지 당한 뒤 “알바니아의 어느 산중에 버려졌다.” 그는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갖혀 있는 동안 쇠고랑을 찬 채 계속 구타를 당하고 나체로 사진까지 찍혔다며 “자신은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마스리는 6일 미국 시민자유연합(ACLU)를 통해 미 연방법원에 조지 테닛 전 중앙정보국장 등 10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특히, 미국 정부가 지난해 마스리를 풀어주기 전 당시 주독 미국대사를 통해 독일 내무장관에게 실수를 인정하면서 함구해 달라고 하자 독일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워싱턴포스트> 4일치 보도 뒤 독일 정부가 미국 요구에 따라 무고한 자국민의 인권 보호를 포기한 데 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다.
이 와중에 6일 메르켈 총리와 회담한 라이스 장관은 ‘불협화음’을 드러냈다. 회담이 끝난 뒤 공동기자 회견에서 메르켈 총리는 “미국 정부가 잘못을 시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라이스 장관은 “우리는 어떤 정책이든 때로 잘못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고만 말했고, 나중에 미 국무부 관리는 “라이스 장관이 마스리 사건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며 “메르켈 총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까지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미국에 친근감을 밝혀온 메르켈 총리가 취임하면서, 독-미 관계가 개선되리라는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다.
동·서 유럽 ‘따로따로’= 비밀수용소 파문을 둘러싸고 유럽이 동서로 나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초기에 파문을 덮고 가려고만 하던 서유럽 국가들은 자국내 언론과 사법부의 압력에 굴복해 자체 조사를 시작한 반면, 정작 비밀수용소 소재지로 지목된 동유럽 국가들은 부인으로만 일관하면서 미국 쪽에 기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과 스페인 사법당국은 중앙정보국 전세기 비행 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상태다. 이탈리아에선 미국 중앙정보국이 2003년 이탈리아에 있던 이슬람 성직자를 납치한 뒤, 그를 추적하던 이탈리아 경찰에 용의자가 제3국으로 달아났다고 거짓정보를 제공한 사건에 대한 밀라노 검찰의 조사가 확대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마니아 정부는 6일 라이스 장관과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가까운 흑해 연안 미하일 코갈니세누 공군기지 안에 미군기지를 설치하는 계약을 맺었다. 루마니아는 폴란드와 함께 미 중앙정보국 비밀수용소 소재지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제레미 사피로는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자격도 매우 중요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국을 ‘안보의 기둥’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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