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이방카에게. 당신은 나를 에스앤에스(SNS)에서 팔로우하고 있죠.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맏딸이자 백악관 보좌관 이방카 트럼프는 최근 같은 모양, 같은 내용의 편지를 잇따라 받았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편지를 보낸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영국 출신의 슈퍼모델 알렉사 청, 미국 코미디언 겸 배우 에이미 슈머와 첼시 핸들러,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움베르토 레옹, 미국 에이치비오(HBO)사의 책임프로듀서 제니퍼 코너 등 유명 인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이방카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계정에 올라온 게시물은 이방카가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 시스템을 노렸습니다. 이방카가 꼭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똑같은 편지를 잇따라 계정에 올린 거죠.
영국 출신의 슈퍼모델 알렉사 청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방카에게 보내는 편지. 인스타그램 갈무리
사실 이들의 편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11월에도 알렉사 청 등이 이방카에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인 ‘다카’(DACA)를 폐지했는데요. 이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을 대표하는 조처였습니다. 알렉사 청 등은 이방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동안 이 프로그램 혜택을 받고 있던 청소년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체 법안인 ‘드림 액트’(DREAM ACT)를 지지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속속 올라온 이방카에게 보내는 편지.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럼 이번 편지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요. 이번에도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요. 시행 한 달 여만에 지난 6월 폐지된 불법이민자 부모-자녀 분리수용에 대해 언급한 이방카의 최근 인터뷰가 직접적인 발단이 됐습니다. 이방카는 2일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백악관 입성 뒤 최악의 순간’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부모-자녀 분리수용이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편지는 이 발언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이방카, 당신은 불법이민자 부모-자녀 분리수용이 본인에게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지만, 최악의 순간은 (당신이 아니라 ) 강제로 헤어져 있는 가족들이 지금 겪고 있어요. 당신은 과거형으로 말했지만 이 위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불법이민자 부모-자녀 분리수용 정책은 미국 법무부의 ‘무관용 정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미국-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예외없이 기소하고 자녀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부모와 분리 수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여 사이에 2000명에 가까운 미성년자들이 국경을 넘다 체포돼 부모와 격리된 채 수용시설에 갇혔습니다.
6월17일 미국 텍사스주 불법이민자 수용시설에서 부모와 격리된 어린이들이 철제 펜스에 갇혀 앉아있다. AP/연합뉴스
부모와의 격리 이외에도 어린이들을 수십명 씩 묶어 철제 펜스에 가두고 알루미늄 포일을 이불로 지급하는 등 수용 환경 역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주자 자녀들에 대한 각별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고, 마이클 헤이든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약자 그룹에 대한 차별”이라는 면에서 나치즘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월21일 분리수용 정책을 철회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습니다. 각계의 비난이 확산되고 공화당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미 부모한테서 분리된 어린이들에겐 해당 행정명령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국 <시비에스>(CBS)는 7일 보도에서 “여전히 수백명의 어린이들이 연방 구금시설에 남아있고, 이 가운데 400명 이상은 부모가 이미 강제추방된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편지는 더욱 구체적으로 수용시설에 갇힌 아이들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 572명이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명은 분리수용 뒤 사망했습니다. 수용시설에서는 성적, 물리적 학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부모 동의도 없이 향정신성 약물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커스텐 닐슨 국토안보부 장관과 당신 아버지 재임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편지는 이방카에게 “인종차별과 비인간적·비양심적인 학대를 지금 당장 멈추라”며 “닐슨 장관의 사임을 요청하라”고 요구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방카는 이 편지를 읽었을까요? 만약 읽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방카는 트럼프 대통령이 분리수용 정책 폐지 행정명령에 사인하는 데 있어서 부인 멜라니아와 더불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서명 직후 의원들에게 “이방카가 자녀를 격리하는 행정부 관행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며 맏딸의 반대가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습니다.
알렉사 청, 에이미 슈머 등 편지의 주인공들은 이방카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정명령 이후에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이 부모와 만날 수 있도록,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정책’의 흐름을 돌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의구심을 드러내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방카가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이방카는 지난 2일 인터뷰에서 “나는 불법이민자 부모-자녀 분리수용에 매우 맹렬히 반대한다.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자 나의 어머니인 이바나 트럼프도 체코에서 온 이민자”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제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방카는 “내 어머니는 합법적 이민자였다”면서 “미국은 법의 나라다. 또 아이들을 인신매매의 가능성에 놓이게 하거나 위험한 국경지대를 혼자 여행하게 하는 등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를 두고 불법이민자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불법으로는 오지 말라”고 선언한 아버지의 해결책을 여전히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편지 공세를 주도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파올라 멘도자 감독의 말을 덧붙일까 합니다. 콜롬비아계 미국인인 그는 배우와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방카가 실제로 무언가 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 (이번 편지 공세의) 목표”라는 그는 미국 인터넷 매체 <버슬>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카는 이번 비극으로 인해 자신도 고통받았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닐슨 장관의 사임을 요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방카의 말은 아버지 트럼프의 말처럼 순거짓일 뿐이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