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정비 구역 여객기 이륙시켜 1시간10분간 비행
인근 섬 추락, 승객은 없어…테러 의심 전투기 추적
관제사 “도움 주겠다” 직원 “필요없다, 게임 해봐”
10일 여객기를 훔쳐 자살 비행을 한 리처드 러셀이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올린 영상 갈무리. 현재는 계정이 삭제된 상태다. 유튜브 갈무리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항공사 지상직 직원이 여객기를 훔쳐 ‘광란의 비행’을 하다 비행기와 함께 추락사했다. 승객이 없는 빈 여객기였지만, 제2의 9·11 테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10일 오후 7시32분 시애틀 터코마 국제공항에서 호라이즌항공 직원 리처드 러셀(29)은 자사 여객기인 Q400 봄바디어 터보프롭을 ‘납치’해 이륙에 성공했다. 파일럿이 아닌 사람이 여객기를 띄운 사실이 알려지자 비상이 걸렸다. 공항 당국은 러셀이 정비구역에 있던 여객기를 관제탑의 저지를 무시하고 이륙시키자 이를 테러 상황으로 간주하고 군 당국에 신고했다. 미국 공군은 오리건주 기지에서 F-15 전투기 2대를 띄워 추락 때까지 추적했다. 승객 76명을 태울 수 있는 이 여객기엔 러셀 외엔 탑승자가 없었다.
미국 호라이즌 항공사 직원 리처드 러셀이 10일 자살 비행을 벌인 큐400 항공기. 로이터 연합뉴스
관제탑은 그에게 즉각 여객기를 착륙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러셀은 이상한 발언들을 쏟아내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관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시애틀 서쪽의 올림픽산에 내려앉은 노을을 보며 감탄했고, 비행기를 착륙시킨다면 감옥에 갈 것이라고 걱정했다. 관제사들은 “여객기를 조종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다”며 회유했지만, 그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전에도 비디오 게임을 해봤다”며 계속 조종했다. 비행기를 남쪽 맥코드 필드 공군기지에 착륙시키자고 제안하자, “거기에 착륙하면 군인들이 매우 거칠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대공화기를 갖고 있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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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관제사에게 “미안하다. 이 일이 당신의 하루를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모르겠다. 나를 돌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을 들으면 실망할 것이다. 모두에게 사과하고 싶다”고도 했다. 또 “나는 그냥 망가진 사람이다. 나사 몇 개가 풀린 것 같다. 지금까지는 정말 몰랐다”는 말도 했다.
목격자들이 에어쇼를 하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는 추락 때까지 위험한 곡예비행을 이어갔다. 비행기를 뒤집기도 했고, 수면 위로 스치듯 비행하기도 했다.
러셀은 1시간10분쯤 이 지역 상공을 돌다 오후 8시47분께 공항에서 남쪽으로 48㎞ 떨어진 케트론섬 수풀에 비행기와 함께 추락했다. 국가교통안전위원회 지역 책임자인 데브라 에크로트는 기체가 뒤집힌 채 산산조각 났다고 설명했다. 연방수사국(FBI)은 러셀의 행동 동기와 추락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비행 기록을 복구하고 있다.
러셀은 3년 반가량 알래스카항공 계열사인 호라이즌항공에서 일했다. 활주로에서 비행기의 움직임을 안내하고 짐을 싣는 일을 맡았다. 동료들은 그를 매우 “조용한 인물”로 기억했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고 증언했다. 러셀의 가족은 11일 낸 성명에서 “그는 믿음직스러운 남편이었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자 좋은 친구였다”고 했다. 러셀의 소꿉친구인 팀 오르는 “러셀은 자신의 임금이 다른 많은 공항 노동자들이 받는 시간당 15달러(약 1만7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했으며, 다른 일을 하겠다는 얘기도 한 적 있다”고 전했다.
범죄 기록도 없고 여러 차례 신원조사까지 통과한 러셀이 왜 그랬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 공항 관계자는 “러셀은 합법적으로 여객기에 접근했으며, 보안 규정을 위반한 것은 없다”고 했다.
<워싱턴 포스트>가 입수한 러셀의 비행 모습. 유튜브
그가 어떻게 혼자 비행기를 몰 수 있었고, 곡예비행을 이어갔는지도 수수께끼다. 미국 공항들은 조종사 한 명만 조종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안 규정과 장치가 마련돼 있다. 철저한 줄 알었던 공항 보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호라이즌항공 최고경영자 게리 벡은 “그는 조종사 면허증이 없다”며 “복잡한 기계를 이륙시키는 기술을, 예컨대 비행기 엔진을 가동하는 전문 지식 등을 어떻게 습득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