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15일 앙카라에서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앙카라/AP 연합뉴스
미국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 석방 요구를 통해 시작된 미국과 터키의 ‘치킨 게임’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터키 정부는 미국의 관세 폭탄에 맞서 보복 조처를 내놨고, 법원은 브런슨 목사 쪽이 제기한 항소를 기각했다. 미국은 “이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압박을 한층 강화했다.
터키 법원은 15일 오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브런슨 목사의 석방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터키가 테러 단체로 지정하고 있는 터키 내 소수민족 쿠르드 조직을 지원한 혐의로 가택 연금돼 있는 브런슨 목사의 재판은 10월 재개된다. 외신들은 유죄가 확정되면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오후 6시까지 브런슨 목사를 석방하라고 ‘최후통첩’했던 미국 정부는 반발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터키, 특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브런슨 목사를 매우 불공정하게, 매우 나쁘게 다루고 있다. 우리 행정부는 결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터키가 미국산 자동차·쌀·주류 등에 최대 140%의 보복관세를 부과한 결정에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10일 터키산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기습적으로 2배 인상한 뒤 리라화 가치는 하루 만에 18%, 연초 대비 45% 폭락했다. 터키는 국가부도에 이를 수 있는 심각한 외환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굴복’ 대신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
터키가 미국과 맞짱을 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터키는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한 뒤 줄곧 미국의 믿음직한 동맹 역할을 다해왔다. 터키는 중동과 흑해 연안을 방어하고,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퇴치에 앞장서왔다. 미국은 지금도 터키 남부 인지를리크 공군기지를 통해 ‘시리아 내전’ 등 주요 중동 사태에 개입한다.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인지 주변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진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은 15일 에르도안 대통령과 오찬을 하고 터키에 150억달러(약 17조31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트럼프 대통령과 껄끄러운 관계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28일 만난다. 두 정상은 전화 회담을 통해 정상회담에 앞서 재무장관과 경제장관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터키는 이란, 쿠웨이트와도 경제·에너지 분야 등에서 관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또 지난달 러시아의 트리움프 S-400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14일엔 외무장관 회담을 했다.
미국에 굴하지 않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스트롱맨’ 성향도 이번 사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미국 대신 러시아 같은 “새 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엄포를 놨고, 12일 연설에선 현재 상황을 “금융에서 정치까지 터키의 굴복을 유도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하며 “위협으로 우릴 길들이려 하지 말라”고 분노했다. 터키의 강경한 자세 때문인지 15일 외환시장에서 리라화는 5.7% 반등했다.
그렇지만 ‘정면 대결’이 이어지면, 두 나라 모두 ‘패자’가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터키 외환위기는 외채에 기대 무리한 확장 정책을 펴온 터키 경제의 취약함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다. 조기 사태수습에 실패하면 지금보다 더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이 경우 미국에 깊은 실망감을 느낀 터키가 나토를 뛰쳐나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워싱턴 이그재미너>는 “미국을 동맹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러시아의 오랜 목표였다”며 “지정학적 혼란은 미국이 이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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