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브렛 캐버노가 지난달 27일 미국 의회 상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한 브렛 캐버노(53)가 성폭력 의혹에도 불구하고 상원에서 인준안이 통과됐다. 이로써 미국 연방대법원의 구성은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보수가 우위를 차지했다. 캐버노의 대법원 입성은 보수 대법관이 한 명 더 늘었다는 것을 넘어 미국의 미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 상원에서 브렛 캐버노(53) 연방대법관 지명자의 인준안이 통과한 지난 6일 오후 캐버노는 의사당 동쪽 길 건너편 연방대법원 청사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부인이 들고 있는 성경에 왼손을 얹고 존 로버츠(63) 대법원장 앞에서 오른손을 들어 “나, 브렛 캐버노는, 미국 헌법과 법률에 따라… 엄숙히 맹세한다”고 했다. 두 딸도 지켜봤다. 캐버노는 고교 시절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 등이 불거졌으나 상원에서 찬성 50, 반대 48로 인준안이 통과됐다. 그는 1789년 연방대법원이 설립된 이후 114번째 대법관이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인 미치 매코널은 “캐버노 인준은 공화당의 빛나는 순간 중 하나”라고 말했다. 대법관 지명권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이기도 하다.
‘원전주의자’ 캐버노
연방대법원은 낙태, 사형제, 총기 소유, 적극적 평등실현 조치(어퍼머티브 액션), 동성 결혼, 공공장소에서의 종교 활동 허용, 이민자 정책 등 미국 사회를 둘로 갈라놓는 정치·사회적 쟁점이 최종 심판대에 오르는 곳이다. 9명의 대법관 가운데 5명 이상이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미국 사회가 몇 걸음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한다. 대법관 인준을 놓고 벌어지는 격렬한 대립은 이 때문이다. 연방대법관은 사임·은퇴하거나 범죄 등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지 않는 한 숨질 때까지 직책을 맡는다. 주법원 판사와 달리 연방법원 판사는 모두 종신직이다. 지금까지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법관은 없다.
캐버노가 대법관에 취임하면서 대법원은 보수 대법관 5명, 진보 대법관 4명으로 나뉘었다. 캐버노는 보수적인 사법철학을 가진 이른바 ‘원전주의자’(originalist) ‘원문주의자’(textualist)에 속한다. 이들은 헌법을 쓰여진 문자의 원래 뜻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법 입안자들이 낙태권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판사들도 낙태권을 인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캐버노는 낙태 등 여러 쟁점에서 보수적 견해를 보여 왔다. 지난해 워싱턴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있을 때, 밀입국한 17살 미성년자가 낙태를 위해 이민자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도록 허용한 판결에 반대하며 “다수 의견은 미국 정부에 억류된 불법 이민 미성년자들이 요구만 하면 즉시 낙태할 수 있는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 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상원 청문회에서 다이앤 파인스타인 민주당 상원의원은 대법원이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1973년) 판결을 다시 뒤집을 수도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 캐버노의 이메일을 공개했다. 캐버노는 “몇몇 학자의 생각을 전한 것”이라고 피해갔다. 그러면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대법원의 중요한 선판례” “확립된 결정”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수사’일 뿐이다. 현 대법원에서 가장 보수적인 클래런스 토머스(70) 대법관도 1991년 청문회에서 “사생활에 관한 하나의 일반 권리로서 낙태의 법적 보호를 믿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강경한 낙태 반대자였고, 대법관이 된 뒤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트럼프도 낙태 판결에 반대하는 법률가를 대법관에 지명하겠다고 밝혀왔다. 캐버노의 취임으로 낙태 합법화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캐버노는 2011년 반자동소총의 소지를 금지한 연방항소법원 판결 당시에 “연방대법원은 권총 소지가 전통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며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다는 이유에서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했다. 오늘날 권총은 대다수가 반자동이다”며 반대 소수의견을 냈다.
보수주의 사법운동의 정점
캐버노의 대법관 취임은 보수 대법관이 한 명 늘었다는 것 이상의 훨씬 큰 의미를 담고 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돼 30여년 동안 진행돼 온 보수주의자들의 ‘사법 반혁명’(대법원의 진보적인 흐름을 되돌리기 위한 보수진영의 운동)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다. <뉴욕타임스>의 연방대법원 담당 기자인 애덤 립택(58)은 “캐버노의 인준은 보수주의 사법 운동의 승리를 상징한다”며 “이 나라의 최고법원에서 확고부동한 다수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레이건 시대에 시작된 수십년 프로젝트의 정점”이라고 평했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판사들을 보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운동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사법 진보주의에 대한 반발과 보수적 판사들에 대한 ‘배신감’에서 시작됐다.
얼 워런 대법원장(1953~1969년 재직)이 이끈 대법원은 공교육에서 인종간 분리를 금지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1954년), 기혼자들의 피임 도구 구입 권리를 인정해 사생활 보호권을 넓힌 ‘그리즈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1965년), 수사과정에서 피의자의 인권을 보장한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1966년)을 내놓았다. 후임인 워런 버거 대법원장(1969~1986년 재직)이 이끈 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놓아 보수주의자들을 경악시켰다. 이 판결문은 해리 블랙먼(1908~1999) 대법관이 작성했다. 이때 대법관들은 7 대 2로 낙태권을 인정했다. 그런데 워런·버거·블랙먼 등은 모두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들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다수였다. 더욱이 리처드 닉슨(1913~1994)은 대법원의 진보주의를 억제할 것을 공약하며 1969년 대통령에 당선했고, 이후 3년 만에 4명의 대법관을 임명했는데, 그가 임명한 4명 중 3명이 낙태 판결에서 낙태 찬성 의견이었다. ‘젊어서는 진보였다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로 바뀌는 게 일반적인데 연방대법관들은 거꾸로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대법원이 민권·여권운동이라는 사회 흐름을 파악하고 함께 호흡한 결과였다.
법조인을 양성하는 로스쿨들도 진보주의가 압도했다.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1911~2004) 후보가 민주당의 지미 카터(94) 후보한테 승리한 뒤 예일대 로스쿨의 한 수업시간에 교수가 90명의 학생들한테 레이건에게 투표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스티븐 캘러브레시(68) 노스웨스턴대 로스쿨 교수는 “나와 다른 학생 한 명만 손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게 계기였다. 몇명의 보수적인 로스쿨생들은 1982년 ‘법과 공공정책 연구를 위한 연방주의자협회’(Federalist Society for Law and Public Policy Studies)를 창설한다. 예일대와 시카고대 로스쿨생을 중심으로 꾸려진 이 단체는 ‘공화당의 큰손’ 데이비드·찰스 코크 형제 등 억만장자 재벌과 보수적인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급성장하면서 사법 반혁명의 중심이 됐다. 캘러브레시가 현재 이 단체 회장이고, 회원은 6만명이 넘는다. 초기부터 이들의 이념적 지도자는 원전주의자인 로버트 보크(1927~2012·레이건 정부 때인 1987년 대법관에 지명됐으나 인종차별과 극단적 보수주의로 인준안 부결)와 앤터닌 스캘리아(1936~2016) 전 대법관이었다.
보수주의 ‘파이프라인’, 연방주의자협회
2007년 11월15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방주의자협회 창립 25주년 행사에는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이 참석했고,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화상으로 축사를 보냈으며, 스캘리아·토머스·새무얼 얼리토(68) 등 대법관 3명도 참석했다. 트럼프가 임명한 닐 고서치(51)와 캐버노 등 현직 보수 대법관 5명이 모두 이 단체 회원이다. 역시 회원인 도널드 맥갠(50) 백악관 법률고문은 지난해 이 단체의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원전주의, 원문주의에 충실한 판사들을 임명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트럼프가 지명할 연방법원 판사들의 후보자 명단을 바로 연방주의자협회의 구심점이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레너드 리오(53) 부의장이 내놓는다. 리오는 트럼프의 부탁을 받아 대법관으로 지명할만한 후보자 25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연방주의자협회 회원이었다. 리오는 연방주의자협회를 “대법원으로 가는 보수주의 파이프라인”이라고 표현한다. 이들한테 연방판사 후보자의 조건은 젊고, 낙태에 반대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고서치와 캐버노 같은 50대 젊은 사람들을 대법관에 앉혀, 적어도 30년 동안 자리를 유지하게 한다는 속셈이다. 대법원 뿐만 아니라 항소법원 등 하급 연방법원도 대부분 연방주의자협회 회원들로 채워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경우 임기 동안 임명해야 할 판사가 54명이었으나, 트럼프는 이미 임명한 대법관 2명을 빼고도 107명이 남아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마친 뒤 남길 유산은 ‘보수화된 사법부’일 것이라는 말이 벌써 나온다. 미국은 연방법원(연방대법원, 연방항소법원, 연방지방법원) 판사들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에서 인준한다.
더욱이 현재 대법원의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나이가 많고 보수 쪽은 젊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85살로 나이가 가장 많고, 다음이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으로 80살이다. 진보적인 이들이 트럼프의 임기 안에 사임 등을 하면 트럼프는 추가로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까지 얻는다.
캐버노의 대법관 취임으로 대법원은 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성폭력 의혹을 받은 대법관이 캐버노 말고도 한명 더 있다.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애니타 힐(62) 현 브랜다이스대학 교수는 직장 상사였던 토머스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희롱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는 성희롱 상황을 구체적으로 캐물으며 2차 가해를 했고, 힐의 증언을 비웃는 모습도 보였다. 토머스의 인준안은 통과됐다. 여성들의 분노는 1992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나타났다. 28명이던 여성 연방하원이 47명으로 늘었고, 2명이던 여성 상원의원도 6명으로 늘었다. 이 해는 ‘미국 의회 여성의 해’로 불린다. ‘직장내 성희롱’의 개념은 이를 계기로 확립됐다.
미국 시민들이 지난 6일 연방대법원 계단에서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자의 인준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쪼개진 대법원, 쪼개진 미국
대법원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 하락도 예상된다. 루이스 파월(1907~1998), 샌드라 데이 오코너(88·2005년 사임), 앤서니 케네디(82)로 이어진 ‘스윙 보터’(진보 또는 보수에 얽매이지 않고 쟁점별로 판단하는 대법관)가 사라지면서 대법원이 더 당파성을 드러낼 것으로 관측되는 탓이다. 스윙 보터들이 균형추 구실을 하면서 낙태 판결이 유지됐고, 동성애 결혼 합법화도 이뤄졌다.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인 오코너가 재직할 때 대법원은 ‘오코너의 대법원’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그러나 이번에 취임한 캐버노가 스윙 보터의 구실을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청문회 때 당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성폭력 의혹에 대해 캐버노는 “클린턴 부부와 외부 좌파 반대그룹을 대변하는 복수극”이라며 “계산되고 세밀하게 조직된 정치적 타격”이라고 주장했다. 캐버노는 198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을 조사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팀에서 일한 바 있다.
캐버노의 대법관 인준 청문회는 양극화된 미국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내보였다. 그의 성폭력 의혹에 대해 여성 민주당 지지자의 64%가 성폭력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여성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는 7%에 그쳤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지금 미국은 내전 중”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양쪽이 상대방을 ‘반대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적’으로 여긴다는 얘기다. 더욱이 트럼프는 이 분열을 부채질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대법원을 장악하며 승리하고 있지만 미국은 패배하고 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