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경선에서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선두에 오르자 그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트럼프에게 필패할 후보’라는 말이 민주당에서 공공연하게 나온다. ‘샌더스가 지나치게 진보적이라서 안 된다’는 2016년 대선의 비토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것이다. 과연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대선에서 트럼프를 이길 수 있을까?
“버니 샌더스의 급진적인 생각은 위험합니다.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 모든 것을 위태롭게 만들 것입니다.”
지난 25일(현지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폭스5> 채널에선 이런 내용이 담긴 30초짜리 광고가 첫 전파를 탔다. 11월3일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상원의원 선거에 나선 켈리 레플러 의원(공화당)이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려는 당내 경쟁자와 다수의 민주당 후보들을 견제하기 위해 버니 샌더스(79) 상원의원을 끌어들여 자신이야말로 ‘참보수’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홍보 광고였다.
연속 1위 샌더스 지지율 상승
2020 대선을 8개월 남짓 앞두고, 미국 정치권이 ‘색깔 논쟁’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두에 오르자 너도나도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성향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적군’인 공화당뿐만 아니라 ‘아군’ 민주당에서조차 ‘샌더스는 너무 급진적이라서 안 된다’는 비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같은 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치러진 민주당 경선 후보자 합동토론회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오죽하면, 샌더스가 “나에 대한 가장 잘못된 인식은, 오늘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 내가 급진적이라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피트 부티지지(39)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은 “지난 4년이 혼란스럽고, 분열적이고, 고갈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2020년에 트럼프와 샌더스가 맞붙었을 때 이 나라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고 공세를 폈고, 샌더스는 “내 공약들이 급진적이라고들 하지만, 이미 전세계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채택되고 있는 것들”이라고 맞받아쳤다.
강성 진보란 포화 속에서도, 샌더스의 초반 질주가 무섭다. 표결 결과 논란을 빚었던 지난 3일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를 제외하더라도,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과 네바다 코커스에서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지지율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정치전문 여론조사 기관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지난 26일 집계한 전국 단위 여론조사 평균을 보면, 샌더스는 29.2%의 지지를 얻어, 조 바이든(78) 전 부통령(18%)과 마이클 블룸버그(78) 전 뉴욕시장(14.4%), 엘리자베스 워런(71) 상원의원(12.4%), 부티지지(10%) 등을 크게 앞서 나가는 모양새다.
미국 언론들은 샌더스 난타전을 방불케 했던 25일 토론회에 대해서 “(샌더스가) 상처를 입었지만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AP) “샌더스에 대적할 확실할 경쟁자가 없음을 보여준 토론”(로이터)이라며, 29일 경선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샌더스가 승리할 경우 사실상 ‘게임 끝’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샌더스 쪽도 이번 대선 경선은 2016년과는 다를 것이라며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9600만달러의 개인 후원금을 모은 데 이어, 1월에도 2500만달러를 추가 모금하는 등 지난 대선 때보다 자금줄이 든든해진데다, 좀 더 일찌감치 선거 조직을 가동하며 판을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2일 네바다 코커스에서 크게 앞선 뒤 샌더스는 “네바다 승리뿐 아니라 전국을 휩쓸 다세대, 다인종 연합을 우리는 막 구성했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핵심 지지층인 유색인종에게도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다. 네번째 경선지인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여전히 밀리고 있지만, 2016년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이곳에서 40%포인트 넘게 패배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대형 주에서 승리를 거둬, ‘압도적 대세’론을 쓰겠다는 것이다.
중도·부동층 끌어올 확장성이 없다
다른 경쟁자들은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며 벼르고 있다. 이제 겨우 경선을 세번 했을 뿐이고, 샌더스가 확보한 대의원 수는 고작 45명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민주당의 최종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 위해 필요한 대의원 수는 전체 등록 대의원(3979명)의 절반을 넘는 1919명이다.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가량(1357명)이 몰려 있는 ‘슈퍼 화요일’(3월3일) 경선의 14개 주 중 대형 주 한곳에서만 승리해도 샌더스가 확보한 대의원 수를 넘을 수준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10~18%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엇비슷한 지지율을 얻는 데 그치고 있다. 바이든과 블룸버그, 부티지지 등 ‘중도’를 자처하는 이른바 ‘3B’ 후보들은 저마다 ‘중도 표심 잡을 사람, 나야 나’를 외치는 모양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세’ 소리를 듣던 바이든은 지난 11일 치러진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5위까지 밀리자, 결과 발표도 보지 않은 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달려가 표밭을 갈아왔다. 바이든은 이곳 흑인 지지 우세를 기반으로 압승을 거두고, 이를 도약판 삼아 슈퍼 화요일 승리로 단박에 판세를 뒤집겠다는 각오다.
권토중래의 결과일까. 몬머스대가 27일 발표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은 36%의 지지율을 얻어 샌더스(16%)를 무려 20%포인트나 앞섰다. 그에게 고무적인 것은 사우스캐롤라이나 민주당 당원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 유권자들이 2명 중 1명꼴(몬머스대 조사 48%)로 바이든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세계 8위 부호 블룸버그는 아예 초반 네차례 경선을 건너뛰고 슈퍼 화요일 경선부터 뛰어드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바이든 대세론이 흔들리면서 민주당 주류가 가장 주목하는 후보다.
경선 첫 데뷔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지난 19일 네바다 토론 참패로 시작부터 휘청했지만, 블룸버그는 막대한 돈을 퍼부어 티브이 광고 공세를 펴는 한편, 유급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운동원까지 기용하며 다시금 ‘중도의 대안’으로 부각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를 위해 샌더스라면 이를 가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러닝메이트로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솔솔 흘러나온다. 2016년 대선 후보를 거치며 당내 최대주주로 자리매김한 클린턴과 손을 잡으면, 자연스레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의 지지를 유도하고 지역 조직도 끌어당겨 승산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민주당→공화당→도로 민주당’의 행보로 생긴 ‘철새 정치인’ 이미지를 지우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아이오와 돌풍’의 주역으로 눈길을 끌었던 부티지지는 조직력과 자금에서 한계를 드러내며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다. 그는 네바다 경선에서 3위에 그친 뒤 “샌더스는 미국인과 대부분의 민주당원이 지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경제를 재편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념적 순수성을 우선할지, 포용적 승리를 우선할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 있다”고 통합을 강조했다.
하지만 슈퍼 화요일 경선 전에 중도 3B 중 어느 한쪽으로 판세가 급격히 쏠리지 않는 한, 샌더스를 꺾기는 더욱 쉽지 않아질 것이란 전망이 커지고 있다. 2020년 대선 이후 정치적 입지를 고려할 때, 중도 후보 중 누구도 경선을 포기할 이유를 찾기 힘들어 계속 표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민주당 주류는 경선 상황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 샌더스가 민주당의 전통적 가치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 밖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는 이미지가 강해 선거 승리의 핵심인 중도 및 스윙보터(부동층 유권자)를 끌고 올 확장성이 없다는 이유다.
특히 샌더스가 민주당의 주자로 나설 경우, 트럼프와의 맞대결이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의 필패 구도로 변질될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민주당의 선거전략가 제임스 카빌은 지난 25일 민주당 후보 합동토론회가 끝난 뒤 <엠에스엔비시>(MSNBC)에 나와 “오직 바보만이 버니가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긴다”며 샌더스 지지자들을 향해 대놓고 “어리석다”는 비난까지 퍼붓기도 했다. 민주당 일각에선 샌더스가 최종 대선후보가 될 경우,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하원 435석 전원, 상원 100석 중 35석 선거)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초반에 샌더스가 앞설 수 있었던 건, ‘3B’ 주자를 비롯해 에이미 클로버샤 등으로 중도 후보들이 난립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판세를 봐서 이길 만한 후보 쪽으로 표를 몰아주자며 은근히 3B 등의 ‘단일화’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지지층의 신뢰도가 높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나서 중도 주자 간, 혹은 샌더스와 중도 주자 간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27일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2016년 민심의 교훈 얻지 못한 민주당
하지만 민주당 주류의 이런 복잡한 셈법이 놓치고 있는 건, 싸움의 ‘진짜’ 상대가 샌더스가 아니라 트럼프라는 점이다. 탄핵 위기까지 내몰렸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의 이달 국정수행 평균 지지율은 46%(리얼클리어폴리틱스 집계)까지 치솟았다. 취임 직후인 2017년 2월에 이어 최고치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는 의견도 65%(23일 <시비에스> 방송 조사)에나 달한다.
이런 조사 결과는, ‘트럼프에게 필패’할 후보라고 샌더스를 깎아내리는 것 외에 민주당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되던진다. 2016년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샌더스가 지나치게 진보적이라 안 된다’는 비토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을 뿐, 어째서 그토록 강조하는 중도의 ‘새 얼굴’은 키워내지 못했느냐는 질문인 셈이다. 민주당 주류가 4년 전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택했던 민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오바마 지우기’에만 골몰했던 트럼프 정부에 맞서 변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의 바람을 담아내지 못한 채 바이든 대세론이나 블룸버그 대안론을 사골 우리듯 재탕, 삼탕하다 여기까지 왔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지금까지 경선 중 샌더스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될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가 29일 열린다. 이번 경선은 중도 반전의 서막이 될지, 샌더스발 정치혁명의 시작이 될지 첫 가늠자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 결과에 따른, 민주당 주류의 ‘선택’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