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전 대법관.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9월18일 췌장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연방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생각하며 ‘평행’이란 단어를 떠올려본다. 두 가지 의미에서이다. 첫번째는 그가 대표하는 미국 여성 법률가들의 삶의 궤적과 우리나라 여성 법률가들의 삶이 평행이론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가 지향하고 도달하려 한 목적지와 현실은 여전히 평행선을 그으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1956년 그는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하였다. 500명 정원에 여학생은 9명뿐이었다. 로스쿨 원장은 여학생들을 초대하여 자택에서 만찬을 열었다. 로스쿨 원장은 하버드대 로스쿨에 여학생을 최초로 입학시키기로 한 용단을 내린 것은 자신이라고 하면서 ‘여성인 여러분이 남성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하버드대 로스쿨을 다니고 있던 남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하버드대 로스쿨 여학생들은 이상하고 신기한 존재였고,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만 쳐다보는 느낌이었으며, 성적이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여자라서 못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고 훗날 수차례 언급하기도 했다. 로스쿨 본관에는 여자화장실조차 없었고 임신한 상태로 시험기간을 보내던 동기 여학생은 남학생들을 향해 남자화장실을 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암에 걸린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로스쿨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로 옮긴 뒤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프랭크퍼터 대법관의 재판연구원으로 추천되었으나 여자이고 두 아이의 엄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다른 판사들도 여성 재판연구원과 함께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를 추천한 교수가 뉴욕의 한 연방법원 판사에게 만일 이 젊은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다시는 재판연구원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해서야 간신히 2년 동안의 재판연구원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훗날 이 판사는 ‘자신의 재판연구원 중 긴즈버그가 최고였다’고 했다.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지난 18일(현지시각) 암 합병증으로 숨졌다. 2018년 4월6일 조지타운대 로스쿨에서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 강연한 긴즈버그. 워싱턴/AP 연합뉴스
1950년대의 하버드대를 1970년이나 1980년대의 우리나라의 법과대학으로 바꾸어 보면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는다. 1970년대 대학교 입학시험장에서는 ‘딸이 입시를 보러 오는 바람에 아들 하나 떨어지게 생겼네’ 하는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의 목소리를 공공연히 들을 수 있었다. 간신히 합격하고도 남학생들만으로 꽉 찬 강의실에서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어 힘들었던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원하든 원치 않았든 여학생 집단 전체에 대한 평가는 혼자 오롯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니던 법대 건물은 1975년 지어졌는데도 여자화장실은 물론 없었다. 대법원의 공동재판연구관이 아니라 대법관 개인의 전속연구관으로 여성 판사가 일하게 된 것은 내가 대법관이 된 이후에야 가능했다.
나는 2010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전미여성법관회의에 초대받았다. 그해 5월 한국에서 열릴 세계여성법관회의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개회식 전날 밤 리셉션이 있었는데 긴즈버그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영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현재 대법원장) 브렌다 헤일 등도 참석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붉은 중국식 재킷에 머플러를 어깨에 걸친 자그마한 체구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았는데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저리도 가냘파 보이는 분이 2008년 ‘사바나 레딩 사건’에서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강력하게 남성 동료 대법관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었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학교가 13살 소녀의 옷을 벗게 하고 몸수색한 것이 문제 된 사건이었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남성 대법관들은 13살 나이의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민감한지 전혀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은 동료 여성 대법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제대로 듣지 않다가 다른 남성이 똑같은 취지의 말을 하면 그제야 그 말에 주목하는 경험을 무수히 많이 했는데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이렇게 목소리가 작으니 그랬겠지라고 다른 남성들을 옹호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 패널토론이 시작되자 긴즈버그 대법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귀에 꽂히는 소리로 바뀌어서 다시 놀랐다. 그는 자신이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도 4살 아이가 있는 유대인 출신의 여자라는 이유로 취직을 못 했던 경험을 소개했다. 당시 대법관이 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던 소토마요르를 축하하면서 1993년 자신이 대법관이 된 이래로 변호사들이 자신을 다른 여성 대법관인 오코너로, 오코너를 자신으로 언급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회기는 한번도 없었다고 해서 청중들의 탄식을 이끌어내었다.
다음날 열린 회의에서 나는 두달 뒤 한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세계여성법관회의에 많은 미국 판사들이 참석해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2년에 한번 열리는 이 회의에는 전세계 여성 법관과 가족 300~500명이 모인다. 당시 한국도 여성 법관의 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었으나, 판결과 육아에 갇혀 법원행정에서 소외돼 있었고 시야를 넓힐 기회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교육 기회를 찾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여성 법관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모으고 협업하여 어렵게 회의 개최를 성사시켰다. 이 행사를 알리기 위해 미국 여성 법관들 앞에 선 나는 ‘1992년 전미여성법관회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면서 처음으로 열린 세계여성법관회의에 참석할 당시 한국의 여성 법관은 10명도 안 되었는데, 이제는 이미 두 명의 여성 대법관을 배출하였고 640여명의 여자 판사가 있다’는 우리나라 사법부의 변화 위주로 말했고 플로어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다음날 한 미국 일간지에서는 내가 했던 연설을 소개하면서 ‘여성 법관들이 늘 하는 그렇고 그런 소리’라는 논평을 하고 있었다. 약간의 자괴감과 함께 ‘이제 미국은 숫자의 문제는 다 이겨낸 것일까, 무슨 말을 했으면 더 임팩트가 있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숫자는 여전히 문제 되었다. 2016년의 긴즈버그가 ‘오늘날 미국 로스쿨 재학생의 절반가량이 여성이고, 연방법원 판사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이며, 로스쿨 원장의 3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다. 긴 생애 동안 엄청난 변화를 목도한 셈이다’라고 숫자를 언급하고, 여성 대법관이 세 명인데 몇 명 있어야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법관 9인 체제인 만큼 아홉 명이 될 때’라고 한 것도 숫자가 여전히 문제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7년의 한 강연에서는 교향악단에서는 원래 여성 단원을 볼 수 없었는데 누군가 오디션 참가자와 심사위원 사이에 커튼을 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 이후로 여성들이 교향악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면서 ‘모든 영역에서 그때처럼 커튼을 치면 좋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절제된 중도파’였던 그가 ‘똑똑한 페미니스트’의 대명사가 되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의 대법원이 중심을 잃고 보수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생긴 생각의 변화를 표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즈음 한 인터뷰에서 ‘요즈음은 초임 판사 시절보다 수줍음을 덜 타는 것 같다. 그보다 정말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법원의 구성이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자신이 도달하려던 목적지와 현실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내가 제시한 반대의견은 언젠가는 법이 되리라 믿는다’고 하고, 후세를 위해 반대의견서를 쓰는 것이며 시간이 흘러 법원이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법학교수가 ‘다수의견을 읽어보라. 그렇게 나쁜 줄 모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루스의 소수의견을 읽어보라. 다수의견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데서 보듯 그의 반대의견은 단순히 후세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2013년 선고된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의 소수의견만 보아도 그렇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주에 거주하는 소수 인종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주정부의 선거법 개정 권한을 규제하는 ‘투표권법’의 위헌 여부가 문제 된 사건에서 다수의견은 투표권법의 핵심조항이 위헌이라고 하였다. 그는 ‘투표권법이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는 행위는 폭풍우 속에서도 옷이 젖을 것 같지 않다고 우산을 내동댕이치는 격’이라고 쓴 소수의견을 낭독하였다. 이전까지 그는 ‘꽉 막힌 잔소리꾼’, ‘왜곡된 페미니스트’, ‘뜨뜻미지근한 급진주의자’ 같은 별명으로 불렸으나, 이 사건 이후 ‘노토리어스 아르비지(RBG)’란 별칭으로 불리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2014년 ‘버웰 대 하비로비 사건’에서 다수의견은 하비로비사가 사주(社主)의 신앙에 따라 직장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피임 비용을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에서 ‘사주라고 해서 종교가 다른 수많은 여성 직원에게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강요할 헌법적 권리는 없다’고 하면서 ‘대법원이 지뢰밭에 뛰어든 것 같아 우려스럽다’는 말을 써넣기도 하였다.
2015년 8월 그는 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다. 나는 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리는 환영만찬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두 차례의 암수술을 이겨낸 그의 건강이 어떤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참석을 수락하였다. 일찍 도착해서 피로한 모습으로 소파에서 쉬고 있던 그는 자신의 발언 시간이 되자 언제 지쳤었느냐는 듯이 힘 있게 일어나더니 청중에게 딸을 소개하고 환영에 감사하는 인사말도 하면서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2010년도에 듣던 그의 목소리보다는 확실히 약해져 있었으나 듣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자리에 돌아가 눈을 감고 쉬고 있는 그를 보며 다가가서 알은척하려던 생각을 접은 채 건강을 기원하면서 만찬장을 먼저 떠났다.
1999년 대장암 수술, 2009년 췌장암 수술, 2014년 우측 관상동맥 스텐트 삽입시술, 2018년 폐암 수술을 받았고, 2019년 췌장암 방사선 치료를 받는 등 질병과 싸워오던 그는 2019년의 췌장암이 간에 전이되어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그의 투병 경력 때문에, 진보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하기 위해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시에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최고 원로로서 우선권을 지니는 것은 보수 성향이 다수인 대법원에서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그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기대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미국이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둔 현시점에서 그는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타이밍에 죽음에게 승리를 내주었다. 보수 성향 에이미 코니 배럿(48)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가 그의 후임으로 지명되면서, 미국 대법원은 진보의 아이콘을 잃고 5:4의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6:3으로 바뀔 수 있는, 그가 생전에 가장 우려하였던 상황으로 바짝 다가가고 있다. ‘절제’하던 삶을 ‘악명 높은’ 삶으로 기꺼이 바꿔나갔던 그의 삶과 평행을 이루는 삶은 어떤 삶일까, 숙제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을 남겨두고 그는 떠났다.
김영란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전 대법관)
*모든 인용은 <노터리어스 RBG>(글항아리), <긴즈버그의 말>(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