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향군인의 날인 11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헌화한 뒤 비를 맞으며 돌아서고 있다. 알링턴/UPI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으로 대선 패배자가 미국을 뒤흔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선봉이라는 미국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위협받고 있다. 표차가 벌어질수록 부정선거에 대한 트럼프의 확신은 더 굳어지는 듯하다. 현실적 계산뿐일까? 사상 최악의 불복 사태를 야기한 트럼프를 만든 것은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도널드 트럼프는 불사조다. 험난한 특별검사 수사와 의회의 탄핵 시도를 물리쳤다. 6번의 파산, 26건의 성폭력 혐의 사건, 4천여건의 소송도 그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74살 나이에 극복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불패 신화에 한 장을 추가했다. 그가 마녀사냥이라고 부른 사건들은 투쟁과 승리로 명성을 키우는 소재로 쓰였을 뿐이다.
개표가 거의 끝나 500만표 이상 차이가 벌어진 11월3일 미국 대선 결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면 트럼프의 철학과 인생 역정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한 탓이다. “내 인생은 오로지 승리에 관한 것이었다. 난 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조다. 트럼프는 1980년 방송 인터뷰에서 “세상은 킬러 본능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고 했다. ‘킬러’ 트럼프에게 패배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트럼프가 패했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는 그렇게 구성돼 있다.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개표 초반에 승리 선언을 하고 우기기 작전에 들어갈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주변 인물들은 일찌감치 불복을 당연한 순서로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개표 초반에 조 바이든을 앞서다가 역전당했으니 아쉬울 법도 하다. 트럼프의 불복은 현실 부정의 심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2016년 대선 직후 일화를 보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그를 사로잡고 있음이 엿보인다. 대통령 취임 사흘 뒤인 2017년 1월23일 트럼프는 공화당 지도부와 회동했다. 국정운영 청사진을 얘기해야 하는 자리에서 트럼프는 뜬금없이 부정선거 탓에 수백만표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했다. 선거인단 수로 힐러리 클린턴을 이겨 당선됐지만 일반투표에서는 약 287만표 뒤진 터였다. 부정이 없었다면 일반투표도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트럼프는 개표 직후에도 트위터로 같은 주장을 했다. 그런데 취임까지 해놓고도 일반투표에서 뒤진 것에 분을 삭이지 못하거나, 혹은 일반투표도 석권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이긴 선거조차 흔쾌히 승복하지 못한 행태는 4년 뒤의 노골적 불복을 예고한 것일 수도 있다.
너무 큰 권력이 걸린 미국 대선은 트럼프의 이번 불복 및 2016년 ‘일부 불복’을 포함해 몇차례 시비와 분란의 소재가 됐다.
1800년 제3대 대선이 시초다. 토머스 제퍼슨은 에런 버와 선거인단을 73명씩 똑같이 나눠 가졌다. 승자는 하원 표결로 가려야 했다. 제퍼슨은 16개 주 가운데 8개 주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1개 주가 더 필요했다. 그는 무려 36차례 표결을 거쳐서야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1824년에도 하원이 승자를 가렸다. 미국이 24개 주로 몸집이 커진 상황에서 치른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은 일반투표 41.36%를 얻어 선거인단 99명을 가져갔다. 그러나 당선 확정에는 131명이 필요했다. 2위 존 퀸시 애덤스는 30.92%(선거인단 84명)를 얻었다. 그런데 잭슨을 지지하기로 돼 있던 켄터키주 출신 하원의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 4위 헨리 클레이가 국무장관직을 대가로 애덤스에게 붙었다. 애덤스는 아버지(제2대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 됐다. 잭슨은 부정거래라고 반발했으나 4년 뒤에야 애덤스를 밀어낼 수 있었다.
1876년 대선은 차라리 곡예였다. 일반투표에서 과반(50.92%)을 얻은 민주당의 새뮤얼 틸든은 공화당의 러더퍼드 헤이스(47.92%)를 거의 30만표 차이로 따돌렸다. 그런데 루이지애나 등 4개 주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일었다. 상·하원 각각 5명씩과 대법관 5명 등 15명 규모의 특별선거위원회가 구성됐다. 양쪽이 7명씩 자기편을 뒀으므로 무당파 대법관 데이비드 데이비스가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특별선거위가 출범할 무렵 일리노이주 의회는 데이비스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일리노이주 민주당은 여기서 찬성표를 던지며 데이비스의 환심을 사 승리를 굳히리라고 기대했다. 이는 엄청난 판단 착오였다. 데이비스가 상원의원에 취임한다며 특별선거위를 떠난 것이다. 공석을 메울 후보들인 나머지 대법관 4명은 모두 공화당계였다. 균형이 무너진 특별선거위는 4개 주 선거인단 20명을 모두 헤이스에게 줘버렸다. 185 대 184, 단 1표 차이로 헤이스가 웃었다. 일반투표 과반 확보 후보가 당선되지 못한 유일한 선거로, 최소 선거인단 표차 기록도 세워졌다.
20세기에도 시비는 이어졌다. 민주당의 존 에프 케네디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맞붙은 1960년 선거에서는 케네디가 9천표 미만으로 이긴 일리노이주나 텍사스주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발생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싸움을 이어가자고 설득했으나 닉슨은 사흘 만에 승복을 선언했다. 2000년에 민주당의 앨 고어는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일반투표에서 55만여표 앞서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렸는데, 고어가 불과 537표 뒤진 플로리다주에서 무효표를 두고 시비가 일었다. 고어는 수개표로 154표까지 따라붙었지만 연방대법원이 재검표를 중단시켜 분루를 삼켰다.
도널드 트럼프가 1990년 4월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서 열린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 리조트 개관 행사에 뉴욕 부동산 재벌이었던 아버지 프레드, 어머니 메리와 함께 참석해 있다. AP 연합뉴스
이런 선례들을 봐도 트럼프처럼 큰 표차로 진 후보가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바이든은 13일까지 개표에서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270명을 훌쩍 뛰어넘는 306명을 확보했다. <시엔엔>(CNN)은 개표가 완료되면 바이든이 최초로 8천만표 이상 얻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트럼프는 여러 주에서 불복 소송에 착수했지만, <에이피>(AP) 통신은 2000년 이후 주 전체 재검표를 한 31건 중 결과가 바뀐 것은 3건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애초 표차가 300표 미만이었을 때였다. 트럼프가 가장 근소하게 뒤진 곳은 1만1천여표 차이가 나는 애리조나주다.
그러나 무적의 트럼프에게 객관적 상황은 문제가 아니다. 애초 그에게 패배는 없으므로, 만약 지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건 부정 때문이다. 트럼프의 문제는 대개 얼마나 크게 이기느냐뿐이었다. 트럼프의 회사가 1976년 뉴욕 코모도호텔 재개발 사업에서 40년 면세 특혜를 받아 논란이 들끓었을 때다. 그는 논란을 꺼낸 기자에게 “왜 40년 면세를 받았냐고? 60년짜리를 받지 못해 그렇다”며 오히려 불만스럽다는 투로 답했다. 백악관에 앉아서도 승자의 아량을 보이기는커녕 걸핏하면 악담을 퍼부은 것은 힐러리가 자신의 승리의 무결성에 흠집을 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승리를 위해 그만큼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문제는 반칙, 우기기, 허세가 결합한다는 점이다. 미국 스포츠 전문기자 릭 라일리가 골프를 중심으로 트럼프의 됨됨이를 파헤친 책 <커맨더 인 치트>는 타인이든 자기든 아무렇지 않게 속이는 모습을 조명했다. 캐디들은 공을 좋은 위치에 놓으려고 발로 차는 습관이 있는 트럼프를 펠레라고 불렀다. 대통령이 돼서도 골프장을 번질나게 드나든 트럼프는 2017년 11월 유명 골퍼 타이거 우즈와 더스틴 존슨 등을 초대해 내기 골프를 쳤다. 트럼프는 공을 물에 빠트렸으나 상대편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짝에게 빨리 새 공을 놓으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트럼프와 가까운 골퍼 수잔 페테르센은 “그가 친 공이 나무 사이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든, 우리가 그쪽으로 갈 때마다 이미 공은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했다. 상대가 그린에 올린 공을 트럼프가 먼저 도착해 벙커로 던지고는 “공이 멈추지 않았다”고 우겼다는 일화도 있다. 불패 신화 이면에는 이렇게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큰 승리를 위한 터무니없는 우기기는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10억달러가량인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별 근거도 없이 갑자기 50억달러로 만들라고 한 게 그렇다. 트럼프의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셈법은 밥 우드워드가 쓴 <격노>에도 나온다. 트럼프가 2017년 11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기지를 방문했을 때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빈센트 브룩스는 기지 건설비의 92%에 이르는 약 100억달러를 부담한 한국의 기여를 강조했다. 트럼프의 반응은 간단했다. “왜 그들이 전부 내지 않지?”
트럼프는 그저 우기고 잡아떼서 계속 승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20만명이 희생되는 와중에도 날마다 1시간 넘는 생방송 기자회견을 이용해 바이러스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고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했다. 골프 반칙은 목격자가 한둘이 아닌데도 “난 절대 공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잡아뗐다.
만약 우기는 것으로도 되지 않는 패배나 굴욕을 마주한다면 그의 자아는 어쩔 줄 모르고 무너져내린다. 2007년 골프에서 트럼프를 꺾은 15살 소년은 훗날 “트럼프는 경기 뒤 축하한다거나 좋은 경기였다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아예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트럼프의 조카 메리 트럼프는 <너무 과한데 만족을 모르는>이라는 책에서 2017년 4월 트럼프의 두 누나를 위한 백악관 생일 축하연을 묘사했다. 트럼프의 큰누나는 트럼프가 7살 때 그 형이 버릇이 없다며 동생 머리에 으깬 감자를 쏟아부은 얘기를 또 꺼냈다고 한다. 온 가족이 까르르 웃었지만 트럼프만은 팔짱을 꽉 낀 채 도끼눈을 떴다고 한다. 메리는 트럼프가 오래전 굴욕을 잊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 썼다.
트럼프가 안팎의 사람들은 ‘킬러가 돼라’, ‘거짓말은 해도 된다’,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건 나약한 것이다’ 등의 신조를 주입한 아버지 프레드를 트럼프의 인격을 주조한 인물로 꼽는다. 이런 신조는 오늘의 트럼프를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이제 불패 신화는 가장 큰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트럼프가 선거 소송에서 지더라도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은 접지 않으리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2024년 재출마가 그의 머리에 있다고 본다. 4년 뒤 바이든이 재선에 도전하면 트럼프는 여전히 4살 ‘젊은’ 후보로서 맞설 수 있다. 그러나 공화당이 그를 다시 내세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공고한 양당 체제 밖에서 후보로 나서는 것은 무모하다. 20세기 초 혁신주의 시대를 이끌며 대단한 인기를 누린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12년 3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공천을 못 받았다. 그는 본선에서 공화당 후보는 앞섰으나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한테 크게 졌다.
불복 행각은 탈세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를 무마하려는 몸부림이라는 해석도 있다. 바이든과의 타협에서 불복을 패로 쓴다는 것이다. 셀프 사면설도 나돈다. 워터게이트 사건 주인공 리처드 닉슨은 1974년 스스로를 사면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법무부가 불가하다고 했다. 닉슨은 사임했고, 부통령을 하다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제럴드 포드가 한달 만에 닉슨을 사면해줬다. 따라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같은 방식으로 트럼프를 사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꿈꾸는 펜스가 포드의 전철을 밟는 것은 쉽지 않다. 포드가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한 원인으로 닉슨 사면이 지목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지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기에 망명설도 나온다. 그는 제3국에도 자산이 꽤 있다.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시나리오는 아니나 그동안의 깜짝쇼들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건 없어 보인다.
어떤 형식일지는 모르겠으나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난다면 이런 말을 남기지 않을까? “난 지지 않았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