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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중동 물밑 지각변동…적과의 동침 마다않는 ‘합종연횡’

등록 2021-12-22 04:59수정 2021-12-22 10:21

미군감축·이란핵협상 부진 탓 ‘중동 각국 새판짜기’
UAE 대담한 행보 뒤 사우디 추인…‘이스라엘 수교’ 흐름될까
이란과도 UAE ‘어색한 회담’, 사우디는 물밑접촉 거듭
아랍에미리트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왕세제와 이스라엘의 나프탈리 베네트 총리가 지난 13일 아부다비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베네트 총리는 이스라엘 총리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했다. AFP 연합뉴스
아랍에미리트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왕세제와 이스라엘의 나프탈리 베네트 총리가 지난 13일 아부다비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베네트 총리는 이스라엘 총리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했다. AFP 연합뉴스

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균형을 짜기 위한 합종연횡이 한창이다. 역내 주둔 미군이 감축 움직임을 보이고 재개된 ‘이란 핵협상’ 전망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에서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주류 이슬람 국가들이 그동안 각각 다른 이유로 적대해온 이스라엘·이란·터키 등과 새롭게 대화를 모색하는 등 ‘새판짜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중동의 대표적인 부국 아랍에미리트다. 아랍에미리트가 앞서 대담한 외교적 움직임을 보이면,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맏형 격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뒤따르거나 추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이며 밀접한 관계인 두 나라가 전략적 소통을 해가며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에미리트는 지난 13일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의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스라엘 총리가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역사상 처음이었다. 베네트 총리는 이날 아랍에미리트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와 4시간 동안 회담하며 우호 협력을 다짐했다. 두 나라는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양국 간 첫 최고위급 회담에 대해 “두 나라 사이의 따뜻한 관계와 긴밀한 파트너십의 발전에 또 다른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이런 양국 관계는 지난해 8월 아랍에미리트가 이른바 ‘아브라함 협약’이란 이름 아래 이스라엘과 전격 수교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수니파 주요국들은 이른바 ‘팔레스타인 대의’(Palestine cause)로 인해 이스라엘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왔다. 이전까지 이스라엘과 공식 수교를 맺은 국가는 국경을 직접 맞댄 이집트(1979)와 요르단(1994) 두 나라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수교를 단행한 뒤 양국 간 무역규모는 올해 10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배나 늘어난 8억7450만달러(약 1조300억원)까지 오르는 등 급속히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화해 흐름에 사우디도 합류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사우디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베냐민 네타냐후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사우디 북부 항구 도시 네옴에서 미국의 중재로 비밀 회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정식 수교라는 ‘격변’은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최근 진행 중인 새판짜기의 최종 목표가 두 나라의 역사적 수교임은 분명하다.

아랍에미리트는 오랜 갈등 관계였던 터키와도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제는 지난달 24일 2012년 이후 9년 만에 터키를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지역 현안과 협력 방안을 협의했다. 아랍에미리트는 이날 회담에서 통화 리라 폭락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터키에 100억달러(약 11조8천억원) 투자를 약속하는 등 ‘구원투수’ 역할도 자임했다. 이런 협력 관계는 이슬람 수니파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른 편에 서서 다퉈왔던 전례에 비춰 이례적인 반전이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터키는 아랍 민주주의 세력의 정치 모델로 자처하며 혁명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왕정 국가인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는 이들을 ‘체제 위협 세력’으로 규정해 철저히 탄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오른쪽)가 14일 리야드에서 카타르의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을 영접하고 있다. 사우디는 2017년 카타르가 이란과 협력 관계를 맺자 단교를 선언했다가 지난 1월 걸프협력회의(GCC)를 계기로 복교했다. AFP 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오른쪽)가 14일 리야드에서 카타르의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을 영접하고 있다. 사우디는 2017년 카타르가 이란과 협력 관계를 맺자 단교를 선언했다가 지난 1월 걸프협력회의(GCC)를 계기로 복교했다. AFP 연합뉴스

터키는 걸프협력회의의 맹주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도 모색 중이다. 터키와 사우디는 2018년 사우디 왕가에 비판적인 칼럼을 쓰다 사우디 비밀요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 이후 날 선 대립을 이어왔다. 카슈끄지가 결혼 서류를 받으려고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렀다가 살해된 사건을 터키가 ‘주권 침해’라 받아들이며 크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가 사우디와 보조를 맞추며 활발한 외교 행보에 나서는 근본 원인은 이들 수니파 국가가 지역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시아파의 맹주국 이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숙적’ 이란과 효과적으로 맞서는 데 수니파 왕정 국가들과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하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줬던 미국은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에 이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등으로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기간부터 미군의 아프간과 중동 개입에 대해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끝없는 전쟁 상태를 종식하겠다”고 공언해왔고, 지난 8월31일 아프간 철군을 알리는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중국과 심각한 경쟁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외국 주둔 미군은 중국에 맞서기 위해 중동 배치 전력을 축소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조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6월 사우디·이라크·쿠웨이트 등에 배치된 패트리엇과 사드 등 미사일방어(MD) 시스템과 전투기 비행중대 등 일부 전력의 감축 계획이 해당국에 통보됐고, 9월엔 실제 일부 전력이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입장에선 미군 감축과 분쟁 개입 자제 등의 움직임이 불러올 힘의 공백이 지역 내 역학관계에 어떤 변화와 불안정성을 몰고 올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요엘 구잔스키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INSS) 연구원은 “중동에는 미국의 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으며 미국이 그동안 말해온 것처럼 실제 여기를 떠나려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재개된 이란 핵협상의 향배도 중동 국가들의 외교 행보를 부추기는 정세 불안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3년 전인 2018년 5월 일방 탈퇴했던 ‘이란 핵협정’(JCPOA)을 복원하기 위한 협상이 최근 오스트리아 빈에서 재개됐지만, 현재로선 타결 전망이 밝지 않다. 지난 8월 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처음 재개된 협상에서, 이란은 미국이 경제제재를 먼저 해제하고 협정 이탈로 이란이 본 손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등 기존 합의 이상의 조건을 들고나왔다. 미국 등이 이에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은 공전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타흐눈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안보보좌관(왼쪽)과 이란의 알리 샴하니 최고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이 지난 6일 이란 테헤란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아랍에미리트의 타흐눈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안보보좌관(왼쪽)과 이란의 알리 샴하니 최고국가안보회의(NSC) 의장이 지난 6일 이란 테헤란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란은 자신들에게 “핵무장 의도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2019년 5월 미국이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뒤 보유 중인 우라늄 농축도를 60%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농축도 9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란의 핵무장에 대해선 ‘숙적’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앙숙’인 사우디 등 중동 국가 대부분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핵무장한 이란이 시리아·이라크·레바논 등으로 손을 뻗쳐 ‘시아 벨트’를 다시 강화하면 중동 정세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에 양보하는 핵협상에 절대 반대한다”며 필요할 경우 독자적으로 이란 핵시설에 대한 공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 이란이 핵무장을 강행하는 시나리오는 주변국들에 끔찍한 악몽이지만, 그 반대 상황이라고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이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군사적 긴장을 높이면, 그 불똥이 다시 중동 전역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 상황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흥미로운 외교적 움직임이 아랍에미리트·사우디와 이란의 ‘어색한 대화’다. 아랍에미리트는 지난 6일 타흐눈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안보보좌관을 이란에 보냈다. 타흐눈 보좌관은 라이시 이란 대통령을 만나 역내 정세와 양국 간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아랍에미리트는 2016년 사우디가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한 것에 항의해 이란 자경단이 사우디대사관을 공격하자, 이란 주재 대사를 소환하며 외교 관계를 단절했었다. 하지만 최근 진행 중인 중동 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두 나라를 같은 테이블 앞에 마주 앉게 했다. 사우디의 사정도 비슷하다. 사우디와 이란도 올해 들어 여러차례 물밑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슈아 테이텔바움 이스라엘 바르일란대학 교수는 “미국 새 행정부의 정책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란은 핵무기를 획득하려는 문턱에 있다면 모두 새 관계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며 “모든 플레이어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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