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선거관리 당국이 26일 개헌안 국민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튀니지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10여년 전 ‘아랍의 봄’의 발상지였던 튀니지가 다시 독재체제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선거관리당국은 26일(현지시각)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94.6%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했다고 밝혔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나 투표율은 30.5%에 그쳤다.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은 투표 불참 운동을 벌여왔다.
이번 개헌으로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행정부와 사법부를 임명해 구성하고 해산할 권한을 갖는 등 사실상 아무 통제를 받지 않고 전권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튀니지는 2011년 당시 23년간 철권을 휘두르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내는 봉기를 성공시키며 ‘아랍의 봄’을 촉발한 나라이다. 당시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튀니지의 봉기에 자극을 받아 민주화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는 기존 정권이 무너지는 격변을 겪었다. 아랍의 봄은 정부의 강경 진압이나 반민주 세력의 반격으로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튀니지는 민주정부를 수립한 유일한 성공사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개헌으로 튀니지는 2014년 개헌으로 만들어진 민주 헌법의 주요 성과를 대부분 무효화하고 사실상 2011년 아랍의 봄 이전의 정치 권력체제로 되돌아가게 됐다. 앞서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전격적인 총리 해임과 함께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으며 지난 3월엔 의회를 해산하고 몇십명의 법관을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등 철권통치를 위한 지반 다지기를 해왔다. 최근 몇 달 동안에도 사이에드 대통령은 야당 인사들을 향해 “세균”, “뱀”, “반역자” 등으로 부르며 공격했고, 투표를 앞둔 25일엔 “나라에 범죄를 지은 모든 이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야당은 이번 국민투표에 대해 투·개표 부정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야당 연합체인 전국해방전선(NSF)의 아메드 네지브 체비는 투·개표 숫자가 “부풀려졌고 참관인들이 현장에서 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선거관리당국이 정직하지 않고 편파적”이라고 말했다. 정치학자 하마디 레디시는 이번 개헌으로 “사이에드 대통령의 권한이 과거 파라오나 칼리프, 오토만 제국의 지배자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튀니지 국내에선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정부가 보여준 혼란과 무능력 등을 들어 이번 조치를 환영하는 이들도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그동안 튀니지는 고물가와 높은 실업률, 부패와 정치적 불안 등에 시달려왔다. 한 시민은 “지난 10년간 국가와 경제 관리의 완전한 실패와 실망을 겪은 튀니지 사람들은 이제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원한다”고 말했다.
사이에드 대통령은 이날 투표 결과를 환영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튀니지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미국은 민주주의 퇴행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냈다. 국무부는 “새 헌법이 견제와 균형을 약화시켜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의 보호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