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바그다그 그린존 내의 의회 의사당을 점거하고는 31일 이틀째 농성중인 시위대들이 지도자인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사진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라크에서 다시 내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총선 뒤 오랫동안 정부가 구성되지 못한 가운데 최대 정파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점거하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자칫하면 이들의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이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라크의 최대 정파를 이끄는 시아파 이슬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지지자들이 31일 이틀째 의회 점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농성 시위대들은 전날인 30일 바그다드 최대 보안구역인 ‘그린존’의 경비를 뚫고 의사당을 점거한 뒤 하룻밤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00여명과 경비 병력 25명이 부상당했다. 사드르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는 지난 27일에 이어 두번째이다. 사드르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발생한 내란에서 미군과 정부군에 맞서는 민병대를 이끌면서 주요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들은 텐트 등을 설치하고 자신들이 반대하는 친이란 시아파 지도자인 모하메드 시아 알 수다니의 총리 임명 철회와 사드르 주도의 정부 구성을 요구했다. 사드르도 31일 트위터을 통해 이번 시위를 “정치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비상한 기회로 가는 첫 걸음”이자 “자발적 혁명”이라 칭하며 “모든 사람들은 개혁주의 혁명가들을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시위를 통해 새 정부 구성 등 향후 정국 흐름에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번 농성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10월 총선의 결과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 사드르가 이끄는 알사이룬(사드르주의자운동)은 전체 329석 중 73석을 차지해 최대 정파가 됐다. 이라크 주민 중 다수인 시아파 정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그가 총리직에 올라야 했지만, 다른 정파들의 ‘비토’로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알사이룬은 이라크에서 미국과 이란의 영향력 일소를 주장하며, 전후 이라크의 정치 체제 변혁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 구성에 실패하자, 지난 6월 소속 의원 전원이 사임하며 다른 정파들을 압박했다. 하지만, 이후 알사이룬의 최대 경쟁 정파인 친이란 연합세력인 ’공조 체제’가 의회 내 최대 세력이 되며, 친이란 정치인인 수다니가 총리로 지명됐다. 그러나 알사이룬 지지자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의회를 점거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종파·민족·지역별로 세력을 분점하는 이라크의 복잡한 정치 시스템이 갈수록 작동 불능 상태로 빠져드는 현실을 반영한다. <알자지라>는 “시위대들은 누리 알 말리키 전 총리에 대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며 “이들은 말리키의 부패와 실정을 비난하면서 수다니는 말리키의 복사판이라고 주장한다”고 전했다. 알사이룬은 이라크의 전후 정치를 주도해온 말리키로 상징되는 전후 기득권 세력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 분석가들은 알사이룬은 이제 신 정부 구성보다 조기 총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아흐메드 루시디 이라크전문가재단 의장은 <알자지라>에 “시위대들이 끝내기 게임에 도달하려면 무스타파 알 카디미 현 총리의 유임, 선관위 장악, 선거법 유지 등을 얻어내야 한다”며 “이는 알사이룬이 향후 3~6개월 내에 있을 것이라고 보는 총선에서 100석 이상을 차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기총선을 통해서 자신들이 확실히 정부 구성을 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하는 상황이 되어야만 이번 점거 사태가 끝날 것이란 지적이다.
이번 사태는 이라크 전쟁 때 미 대사관, 미군 사령부, 정부 청사들을 보호하려고 만들어진 그린존의 보안까지 뚫고 발생한 것이어서 자칫하다간 심각한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알사이룬이나 경쟁 조직인 친이란 정파 모두 막강한 무장 민병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라크 주민들은 이라크 전쟁 이후 긴 내란과 이슬람국가(IS)와 전쟁을 겪어 왔다. 2019년부터는 실업과 생필품 부족에 항의하는 장기 시위 사태가 이어지는 중이다. 특히 2019년 시위에서는 이라크 정치를 주도해 온 시아파 정파 등 모든 정치세력의 제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주민들의 불만이 비등점을 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알사이룬이 세력을 키워왔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