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백린탄을 레바논 공격에 사용했다고 국제앰네스티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주장했다. 사진은 지난달 15일 백린탄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군 포탄이 레바논 남부 국경 마을에 투하돼 폭발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이스라엘군이 무장조직 헤즈볼라를 공격한다면서 전선을 레바논으로 확장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 다이라에서 국제법상 금지된 무기인 백린탄(치명적 독성물질인 백린으로 만든 폭탄)을 썼다는 증거를 지난달 29일 공개하고 “전쟁범죄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틀 전,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카림 칸 검사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가자지구 민간인들을 봉쇄하고 식량과 의약품마저 끊은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회견에 앞서 그는 소셜미디어에 동영상 성명을 올리면서 이스라엘이 로마 규약에 따른 ‘형사 책임’을 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공격뿐 아니라 ‘2014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적극 조사하고 있다”고 했고, 가자지구 무장조직 하마스 역시 조사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세계는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전쟁 자체가 무엇보다 참혹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 참혹하게 만들 수 있다. 전쟁포로를 고문하고 죽이고 강제 노동을 시키지 못하게 국제법으로 규정하고, 신체에 끔찍한 고통을 지속시키는 무기를 쓰거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면 국제사회가 제재하는 식으로 룰을 만드는 목적이 바로 전쟁을 덜 참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엔에서 통과된 각종 조약과 국제법들, 유엔의 결의안 등등은 그런 룰을 표현한 틀이다.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이나 이스라엘의 백린탄 사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지역 폭격 등등 국제법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들이 물론 많다. 그러나 국제적인 룰이 없을 때와 비교해보면, 대부분의 국가들은 불이익을 우려해 규칙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대량 학살, 의도적인 민간인 살상, 전시 성폭행과 전쟁포로 학대 및 처형, 민간인 지역과 보건·의료·교육·시설 등 인프라 파괴 등을 가리켜 흔히들 반인도범죄라 부른다. ‘전쟁범죄’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전쟁범죄를 국제사회가 재판 형식으로 법정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직후의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의 활동 근거가 된 런던 헌장에 ‘반인도주의 범죄’라는 새로운 법적 범주가 만들어졌다. 당시 또 하나 덧붙여진 개념은 ‘반평화범죄’로, 전쟁을 계획하고 일으킨 행위 자체를 범죄로 다루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다. 홀로코스트가 이슈가 된 것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학살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였다.
다른 모든 개념들처럼, 범죄에 대한 인식도 시대와 함께 진화한다. 반인도범죄 개념은 국제 관습법과 여러 국제법원의 재판들을 거치며 발전해왔다. 가장 명확한 기준은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하기 위해 1998년 채택된 로마 규약이다. 규약에 따르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공격’으로 살인 및 학살, 노예화, 강제 추방이나 강제 이송, 투옥과 고문, 성폭행과 강제 임신, 강제 불임시술 등을 저지르는 것이 반인도범죄에 해당된다. 인종이나 민족 혹은 문화적·종교적인 이유로 특정 집단을 박해하는 것이나 인종 분리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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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 이후 옛 유고슬라비아연방 전범재판소(ICTY), 르완다 내전 전범재판소, 서아프리카 내전 전범재판소,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재판소 등이 만들어졌으나 운영 과정은 말 그대로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또한 이 재판들은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려 피의자들이 ‘천수를 누리는’ 경우가 많았고, ‘지연된 정의’가 과연 정의인가에 대한 물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로마 규약은 르완다 내전과 옛 유고연방 내전 뒤 국제사회에서 반인도범죄를 심판할 공통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생겨났다. 이 규약에 따라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됐으며 현재까지 한국을 포함해 123개국이 서명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사건이 접수되면 검사실에서 사전 검토를 한 뒤 ‘공식 수사’에 들어간다. 검사가 기소를 하면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으로 넘어간다. 사전심판부에서 정식 재판에 부칠 것인지를 검토하고, 결정이 되면 1심 재판부에서 재판을 맡는다. 분쟁 당사자들에게 적용되는 국제 인도법이나 무력충돌에 관한 국제법은 하나의 성문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49년의 제네바 협약과 그에 딸린 의정서들이 법전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강대국들이나 반인도범죄 혐의를 받는 국가들은 로마 규약을 거부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미국은 로마 규약에 서명했다가 철회했다. 러시아·중국·인도는 서명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은 2015년 로마 규약 가입국이 됐다. 팔레스타인 요청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가 2014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불법 정착촌 건설을 조사했을 때 이스라엘은 로마 규약 가입국이 아니라며 “국제형사재판소의 권한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였던 파투 벤수다의 요청에 따라 국제형사재판소는 서안과 가자, 동예루살렘에도 관할권이 존재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후 벤수다가 5년 간의 예비조사 뒤 정식 조사에 착수하자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벤수다의 미국 비자를 취소하고 금융 제재를 했다. 이듬해 6월 벤수다가 퇴임한 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 사건 조사를 중단했다.
가자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 몇몇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국제형사재판소의 개입을 요청했다. 카림 칸 검사는 “결단력을 가지고” 조사하겠다며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정치지도자나 군 지도부를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수사하고 기소해도 법정에 출석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엄청난 압박이 되고 행동에 제약을 가할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군 관리와 정치인들은 로마 규약 가입국을 방문할 때 체포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국제기구에서 미국의 보호에 의존해왔으나, 로마 규약에 가입하지 않은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유럽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국제형사재판소에 강력한 수사와 기소를 요구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옹호하려면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숱한 압박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상대로 칼을 빼들면서 국제형사재판소는 국제사회 앞에서 ‘정의’의 기준을 보여줘야 하는 위치에 섰다.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