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에서 현지 경찰들이 25일 탈레반에 의해 살해된 고 배형규 목사의 시신을 차량에 싣고 이동하고 있다. 외신들은 이날 아프간 관리의 말을 인용해 배 목사의 시신이 가즈니주의 미군 기지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가즈시/ AP 연합뉴스
비무장 인질에 10발 총격…‘살해’ 목적 아닌 다른 의도
탈레반은 잔혹했다. 탈레반 납치세력은 25일 저녁 8시13분(한국시각) 가즈니주 카라바그 지역의 사막으로 배형규 목사를 끌고 간 뒤 머리, 가슴, 배에 10발이나 총을 쏴 살해한 뒤 주검을 도로에 버렸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은 전했다. 보복이나 원한이 있는 경우에나 볼 수 있는 살해 수법이다. 그들은 왜 이런 잔혹한 방법을 택했을까? 선명성의 과시 ‘처형’ =우선 기독교 목사인 그가 이슬람세력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교리를 채택하고 있는 탈레반의 목표물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종화 경찰대 교수는 한발으로 살해할 수 있는데 열발이나 총을 쏘았다는 것은 ‘처형’ 방식을 택한 것으로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설명한다. 아프간 정부가 수감자 석방이라는 탈레반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것을 강력하게 압박하는 것이자, 대내적으로는 인질 일부 석방을 주장하는 온건파에게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탈레반 내 강경파가 ‘돈이 아닌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명분을 쌓고, ‘이교도’인 기독교 목사를 ‘처형’했다는 선명성을 과시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탈레반의 조직 기반 확대와 강경파의 주도권 강화를 의도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기독교는 물론 이슬람 내의 다른 종파인 시아파를 이단으로 여겨 학살을 벌일 정도로 강경하다. 1998년 북부 도시 마자르 이 샤리프와 바미안에선 이틀 동안 시아파인 몽골계 하자라족 민간인 8천여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탕작전 속 강경파 득세 = 여기에 더해 최근 탈레반 내부의 복잡한 사정과 아프간 정세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지난 5월 중순 미군은 아프간 남부 헬만드에서 탈레반의 야전 사령관인 물라 다둘라를 교전 끝에 살해했다. 다둘라는 아프간 남부 지역을 총괄하는 군 사령관이자, 날카로운 협상가였다. 그는 파키스탄 당국을 통로로 미군·나토군과 협상을 벌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둘라가 숨진 뒤 파키스탄에 있는 탈레반 지도부(지도위원회·슈라)는 지역별로 지휘관을 따로 임명해 현지 상황에 맞게 싸우도록 했다. 조직체계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며 매우 복잡해졌다. 다둘라의 사망 이후 탈레반 지도부는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아프간에서는 나토군이, 파키스탄에서는 미국의 압박에 등떠밀린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이 탈레반에 대한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전선에서는 매일 수십명씩의 탈레반 무장세력이 목숨을 잃고 있다. 연합군은 배 목사가 숨진 25일 밤부터 26일 새벽까지 야간작전을 벌여 탈레반 무장세력 50여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강경파들이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강경파들은 온건파들이 일부 인질들을 석방하려하는 데 반발하며, 배 목사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돈 아닌 수감자 요구 경고 =아프간 정부가 ‘수감자 석방’ 요구를 무시하고 ‘몸값’쪽으로 방향을 돌리려 하는 데 대한 탈레반의 경고일 수 있다. 탈레반으로서도 이번 사건은 2001년 미국 침공으로 정권을 잃고 저항에 나선 뒤 최대의 외국 인질 사건이다. 지난 3월 탈레반이 이탈리아 기자를 납치한 뒤 20여일 만에 5명의 수감자와 맞교환했다. 이는 탈레반에게 엄청난 성과였다. 이번에도 그들은 수감자 석방을 요구했으나,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이를 들어줄 수 없는 아프간 정부는 ‘몸값’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탈레반은 여성 탄압과 강경한 이슬람근본주의로 악명 높기는 했으나, 1996년~2001년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이끌던 통치세력이었다. 2001년 미·영 등 다국적군에 쫓겨난 이들의 목표는 현 아프간 정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재장악하는 것이다. 돈보다는 전체 조직을 향해 지도부의 ‘업적’을 보여줄 수 있는 수감자 석방이 필수다. 그들은 돈으로 문제를 풀려는 협상팀에게 배 목사의 끔찍한 주검을 통해 ‘탈레반을 얕보지 말고 요구를 들어줘야만 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아프간 정부가 수감자 8명을 풀어주기로 약속만 해놓고 풀어주지 않았거나, 한국인 인질 8명을 인계해주기로 한 장소에서 납치세력들을 붙잡으려 한 데 대한 보복일 가능성도 높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배형규목사 머리·가슴·배에 10발 난사 ‘처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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