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나설 수 없는 일", '물밑협조' 입장 고수
탈레반 무장세력이 한국인 인질 1명을 추가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30일(현지시각)에도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중한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톰 케이시 국무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인질들의 가족이나 한국 정부 모두에게 지금은 분명히 힘겨운 시간"이라며 한국 정부의 인질 구출 노력을 지지한다고 거듭 밝혔다.
케이시 부대변인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 논의에 있어서 아주 신중하고자 한다"면서 한국인 인질들이 즉각 석방돼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케이시 부대변인의 발언은 인질 추가 살해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에 나온 것이지만, 인질 살해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한 국무부 관리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한국 정부와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입장만 강조했다.
이 관리는 이번 사태는 "미국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 한국 정부의 사태 해결 노력을 도우려 한다고 거듭 밝혔다.
미국 관리들의 이 같은 반응은 사태 발생 직후부터 취해온 지극히 신중하고 원칙적인 입장표명과 크게 달라진게 없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사건 직후부터 이번 사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인질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한편, 이번 문제는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아프간 정부와 한국 정부가 풀어야 할 사안으로 규정해 공식적, 표면적으로 거리를 두어왔다.
탈레반측이 "(인질들은) 봉사단원이 아니라 미국과 아프간 정부를 돕기 위해 온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거나, 여성 인질의 외신 인터뷰를 통해 "미국과 유네스코에 우리를 구해달라고 전해달라"고 호소하는 등 미국을 끌어들이려 애쓰는데 대해서도 미국은 오불관언의 자세로 일관했다.
미국 정부의 한 관리는 인질 추가 살해 소식이 전해진 뒤에도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고 말해 기존 원칙에 흔들림이 없음을 시사했다.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숱한 자국민 및 외국인 납치 사태를 겪어온 미국은 그동안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꾼 적이 없으며, 자칫 탈레반의 전술에 말려들 경우 앞으로 알 카에다 등 테러조직 및 무장세력의 인질 납치를 부추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미국이 나설 경우 아프간 정부의 협상력과 정통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물밑에서 드러나지 않게 한국 및 아프간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한다는 미국 정부의 기조는 앞으로도 바뀌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외교소식통은 "미국 정부가 이번 사건과 관련된 정보제공이나, 인질사태에 대한 조언 등을 우리측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면서 "사건 발생직후부터 `미국인이 잡힌 것처럼 관심을 갖고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른 소식통도 "미국 정부가 사태 발생 직후부터 날마다 이 문제를 주요 현안으로 다루며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한미간 협력체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해결되기는 커녕 희생자가 늘어나고, 탈레반측이 무엇보다 죄수 석방 요구를 집중적으로 내세움에 따라 미국의 고민도 깊어지는 모습이다.
특히 탈레반측 요구 수용을 가로막는 최대 당사국은 바로 미국이라는 시각과 미국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만 사태가 풀릴 것이란 지적들이 일각에서 고개를 들면서 미국의 입장은 갈수록 곤혹스러워지고 있다.
이기창 특파원 lkc@yna.co.kr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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