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파키스탄 서부의 부족지역인 모하만드에 있는 ‘붉은 사원’ 앞에서 지난달 31일 친탈레반 무장 전투원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모하만드/AP 연합
민족주의로 통하고 평화조약으로 손잡아
프랑스 국제관계 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사
소말리아부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을 거쳐 레바논에 이르는 지역에서 혼돈 상태가 심화하고 있다. 국가가 약화하고, 중앙권력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무장세력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이 지역은 ‘제3차 세계대전’과 ‘대테러 전쟁’의 주요 무대다. 동시에 이슬람주의 내부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실도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적 탈레반, 파키스탄과 타협=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소속 외국인 전사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탈레반은 민족주의적 전략을 중시하며 파키스탄 당국과 타협을 추구한다. 반면 알카에다 소속 전사들은 ‘불순해 보이는’ 무슬림 정권의 전복을 부르짖고 있다.
최근의 사건들은 무장 이슬람주의 운동 내부의 불화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슬람주의 투쟁을 둘러싼 주요한 두 개의 전략이 점점 더 격렬히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3월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인 와지리스탄 남부에서 탈레반 대원들은 알카에다에 속한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 소속 외국인 전사들을 살해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이후 외국인 지원병들은 파키스탄과 이라크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나쁜 무슬림들’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타크피리즘’ 이념으로 무장한 알카에다의 과격 전사들이다. 탈레반 지도부와 토착 이슬람주의 저항세력들은 이들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간다.
2003~06년 남·북 와지리스탄과 아프간, 이라크 등 광활한 전쟁터의 복잡한 상황은 알카에다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대시켰고, 토착 그룹들을 침묵시켰다. 알카에다의 타크피리스트들은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이슬람 국가’를 만들려 했다. 그들은 파키스탄의 친서방 군사정권에 맞선 봉기를 최종 목표로 삼았다. 많은 탈레반 지도자들은 알카에다의 타크피리스트들이 외세에 맞선 민족저항투쟁을 파키스탄의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변질시켰다고 우려했다.
예멘인과 이집트인의 ‘두가지 길’=탈레반과 알카에다로 대표되는 이슬람주의 내부의 두 주요 전략의 불화는 1980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에 무자헤딘들이 소련의 아프간 점령에 맞서 ‘성전’, 그리고 그 이후 알카에다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킨 독특한 상황을 검토해봐야 한다. 소련의 아프간 점령에 대항하려고, 아프간에 몰려들었던 아랍인들은 ‘예멘인’과 ‘이집트인’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예멘인’ 진영은 주로 지도자를 따라 아프간으로 찾아온 종교인들이었다. 전투가 없을 때면 그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고 직접 요리를 했다. 이샤(하루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프간 ‘성전’이 끝나갈 무렵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거나 아프간, 파키스탄인들과 결혼해 지역사회에 융합됐다.
‘이집트인’ 진영은 정치화되고, 이념적으로 잘 무장된 사람들로 구성됐다. 대부분은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소속이었다. 의사, 엔지니어 등 지식인들이 다수였다. 그들 대다수는 나중에 오사마 빈라덴의 오른팔이 된 아이만 알자와하리 박사의 이슬람 지하드 비밀운동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던 그룹이다. 그들은 중동의 ‘괴뢰’ 정부들과 미국 때문에 아랍 세계가 쇠락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집트인 캠프에서는 이샤가 끝난 뒤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다. 알카에다는 1980년 압둘라 아잠 박사가 아프간 저항운동을 지원하려고 창설한 ‘마크타브 알카다마트’(정보국)에 기원을 둔다. 그는 89년 테러로 암살됐다. 그의 제자인 빈라덴이 수장 자리를 물려받고, 이 단체를 알카에다로 변모시켰다. 압둘라 아잠의 아들인 후다이파 아잠은 최근 암만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프간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진 뒤, 정치적 야망이 충족되지 않은 채 남은 ‘이집트인들’은 96년 수단에서 돌아온 빈라덴이 합류하자 그에게 타크피리스트 시각을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당시까지만 해도 빈라덴의 생각은 미국의 패권에 대한 투쟁에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9·11 사태가 일어나고, 그가 사우디 지도자들을 공격했을 때, 나는 이집트인 진영이 빈라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탈레반과 파키스탄의 평화조약=2006년 초 4만명이 넘는 아랍·체첸·우즈베키스탄 출신 전사들이 와지리스탄인들, 도시 출신 파키스탄인 투사들과 함께 와지리스탄에 집결했다. 탈레반 지도부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외국 전사들 대부분이 아프간을 점령한 외세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접경 지역의 파키스탄 무장병력과 싸우려 했기 때문이다. 탈레반 지도부는 이런 갈등이 2006년 봄에 개시할 예정이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군대에 대한 대공세를 지연시킬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이 공세에 집중하도록 파키스탄 내 탈레반과 알카에다 지부 설득에 나섰다. 그는 물라 다둘라(아프간 남서부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2007년 5월 피살됐다)를 파견했다. 이 중재를 통해 2006년 9월5일 파키스탄 군대와 접경 지역의 탈레반은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외국인 전사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파키스탄 당국은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탈레반 지도자들과 공고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상당한 양의 무기와 은을 제공받았다. 이 조약은 탈레반 지도부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조약 체결 전 5년 동안의 알카에다와 협력 뒤 아프간에서의 저항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2006년의 공세는 수제 폭탄을 제조하는 등 이라크에서 배운 도시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던 게릴라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탈레반들은 칸다하르 함락이나 카불 포위 같은 주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탈레반 지휘관들은 잘 조직된 국가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정부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내고, 자연스럽게 옛 후견인인 파키스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9월5일 조약이 그 결과물이다. 조약은 양쪽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지도자들이 이 조약으로 알카에다의 도발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아프간에서 반외세투쟁을 약화시키는 편집광적인 알카에다의 전략에 염증을 느낀 탈레반의 방침에도 부합했다. 알카에다, 이라크로=그러나 와지리스탄에 새로 구축한 기지에서 투쟁을 모색하던 알카에다 소속 ‘지구 전사들’은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들 사이의 이견을 부채질하며 휴전을 깨려고 했다. 탈레반 지휘관인 하지 나지르는 알카에다의 외국인 전사들에게 무장해제 혹은 나토군에 대한 공세 강화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예상대로 외국인 전사들은 이 제안을 일축하고, 2007년 3월 무장충돌이 발발했다. 140명 이상이 숨졌다. 사망자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결국 탈레반 지휘부는 외국인 전사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이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가도록 길을 내줘야 했다. 외국인 전사들은 새로운 약속의 땅인 이라크로 가기를 선호했다. 알카에다는 즉각 와지리스탄의 전사들을 이라크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는 이라크에서의 저항투쟁을 자신들의 전체적 비전에 맞추려 했다. 그럴수록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을 벌이던 이라크 지도자들은 점점 불안을 느꼈고, 외국인 전사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라크 무슬림학자연합의 알파이디 박사는 “오늘날 우리는 초창기의 열정적 충동 속에서 알카에다를 받아들였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알카에다의 첫 전투원들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늘날 알카에다가 하는 모든 것은 저항투쟁을 심각하게 훼손시킨다”고 말한다. 알카에다를 받아들였던 탈레반과 이라크 저항세력 등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파키스탄의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으로부터 실질적 지지를 얻어냈던 탈레반 지휘관인 물라 다둘라의 사망으로 아프간과 파키스탄 동부 전선은 불확실성이 커졌다. 그러나 탈레반 온건파들과 카불 정부 사이에 권력분할 방식을 협상시킨다는 파키스탄 정부의 목표는 그대로다. 이는 타크피리즘 신봉자들이 새로운 무슬림 땅을 향하여 ‘대장정’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날 새로운 땅은 또다시 그들을 추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에드 살림 샤흐자드(Syed Saleem Shahzad)/<아시아타임스> 파키스탄 지국장
‘이집트인’ 진영은 정치화되고, 이념적으로 잘 무장된 사람들로 구성됐다. 대부분은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소속이었다. 의사, 엔지니어 등 지식인들이 다수였다. 그들 대다수는 나중에 오사마 빈라덴의 오른팔이 된 아이만 알자와하리 박사의 이슬람 지하드 비밀운동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던 그룹이다. 그들은 중동의 ‘괴뢰’ 정부들과 미국 때문에 아랍 세계가 쇠락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집트인 캠프에서는 이샤가 끝난 뒤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을 벌였다. 알카에다는 1980년 압둘라 아잠 박사가 아프간 저항운동을 지원하려고 창설한 ‘마크타브 알카다마트’(정보국)에 기원을 둔다. 그는 89년 테러로 암살됐다. 그의 제자인 빈라덴이 수장 자리를 물려받고, 이 단체를 알카에다로 변모시켰다. 압둘라 아잠의 아들인 후다이파 아잠은 최근 암만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프간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진 뒤, 정치적 야망이 충족되지 않은 채 남은 ‘이집트인들’은 96년 수단에서 돌아온 빈라덴이 합류하자 그에게 타크피리스트 시각을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당시까지만 해도 빈라덴의 생각은 미국의 패권에 대한 투쟁에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9·11 사태가 일어나고, 그가 사우디 지도자들을 공격했을 때, 나는 이집트인 진영이 빈라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탈레반과 파키스탄의 평화조약=2006년 초 4만명이 넘는 아랍·체첸·우즈베키스탄 출신 전사들이 와지리스탄인들, 도시 출신 파키스탄인 투사들과 함께 와지리스탄에 집결했다. 탈레반 지도부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외국 전사들 대부분이 아프간을 점령한 외세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접경 지역의 파키스탄 무장병력과 싸우려 했기 때문이다. 탈레반 지도부는 이런 갈등이 2006년 봄에 개시할 예정이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군대에 대한 대공세를 지연시킬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이 공세에 집중하도록 파키스탄 내 탈레반과 알카에다 지부 설득에 나섰다. 그는 물라 다둘라(아프간 남서부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2007년 5월 피살됐다)를 파견했다. 이 중재를 통해 2006년 9월5일 파키스탄 군대와 접경 지역의 탈레반은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외국인 전사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파키스탄 당국은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탈레반 지도자들과 공고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상당한 양의 무기와 은을 제공받았다. 이 조약은 탈레반 지도부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조약 체결 전 5년 동안의 알카에다와 협력 뒤 아프간에서의 저항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2006년의 공세는 수제 폭탄을 제조하는 등 이라크에서 배운 도시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던 게릴라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탈레반들은 칸다하르 함락이나 카불 포위 같은 주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탈레반 지휘관들은 잘 조직된 국가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정부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내고, 자연스럽게 옛 후견인인 파키스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9월5일 조약이 그 결과물이다. 조약은 양쪽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지도자들이 이 조약으로 알카에다의 도발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아프간에서 반외세투쟁을 약화시키는 편집광적인 알카에다의 전략에 염증을 느낀 탈레반의 방침에도 부합했다. 알카에다, 이라크로=그러나 와지리스탄에 새로 구축한 기지에서 투쟁을 모색하던 알카에다 소속 ‘지구 전사들’은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들 사이의 이견을 부채질하며 휴전을 깨려고 했다. 탈레반 지휘관인 하지 나지르는 알카에다의 외국인 전사들에게 무장해제 혹은 나토군에 대한 공세 강화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했다. 예상대로 외국인 전사들은 이 제안을 일축하고, 2007년 3월 무장충돌이 발발했다. 140명 이상이 숨졌다. 사망자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결국 탈레반 지휘부는 외국인 전사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이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가도록 길을 내줘야 했다. 외국인 전사들은 새로운 약속의 땅인 이라크로 가기를 선호했다. 알카에다는 즉각 와지리스탄의 전사들을 이라크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는 이라크에서의 저항투쟁을 자신들의 전체적 비전에 맞추려 했다. 그럴수록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을 벌이던 이라크 지도자들은 점점 불안을 느꼈고, 외국인 전사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라크 무슬림학자연합의 알파이디 박사는 “오늘날 우리는 초창기의 열정적 충동 속에서 알카에다를 받아들였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알카에다의 첫 전투원들이 이라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늘날 알카에다가 하는 모든 것은 저항투쟁을 심각하게 훼손시킨다”고 말한다. 알카에다를 받아들였던 탈레반과 이라크 저항세력 등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파키스탄의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으로부터 실질적 지지를 얻어냈던 탈레반 지휘관인 물라 다둘라의 사망으로 아프간과 파키스탄 동부 전선은 불확실성이 커졌다. 그러나 탈레반 온건파들과 카불 정부 사이에 권력분할 방식을 협상시킨다는 파키스탄 정부의 목표는 그대로다. 이는 타크피리즘 신봉자들이 새로운 무슬림 땅을 향하여 ‘대장정’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날 새로운 땅은 또다시 그들을 추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에드 살림 샤흐자드(Syed Saleem Shahzad)/<아시아타임스> 파키스탄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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