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와이 키바키 케냐 대통령이 속한 키쿠유족에 대한 인종청소가 한창인 키수무에서 29일 몇몇 남성들이 부서진 트럭과 불붙은 타이어로 임시 바리케이드를 친 채 경계를 서고 있다. 키수무/AP 연합
특정 지역서 특정 부족 몰아내
미 외교관 언급…제2르완다 우려
토속어 라디오방송, 증오 부추겨
미 외교관 언급…제2르완다 우려
토속어 라디오방송, 증오 부추겨
“개코원숭이의 정권을 무너뜨리자.” “서쪽에서 온 짐승들을 쳐 죽이자.”
케냐의 라디오에서는 요즘 이런 증오에 가득 찬 방송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지난해 12월27일 대선 부정 시비로 시작된 유혈사태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로 번져가는 조짐이다. 가장 전파력이 강한 라디오 방송국들이 종족 간 학살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는 양상은 1994년 르완다 대량학살과 닮았다고 유엔 인권관련 보도매체인 <아이린>(IRIN)은 전했다.
실제로 현재 케냐의 주요 도시에서는 라디오가 선동하는 무차별적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 27일 수도 나이로비에서 루오족 청년들은 다친 빈민들을 보살피던 키쿠유족 의사의 머리를 베는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 50만명이 사는 대도시 키슈무에서는 경찰서 앞에서 노숙하는 150명을 제외하곤 키쿠유족이 모두 떠났다. 사실상 인종청소가 완료된 케냐의 첫 도시가 됐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담장을 맞대고 사는 이웃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학살이 자행된 94년 르완다 대량학살과 유사한 양상이다.
키쿠유족은 부정선거 논란 속에 재선된 므와이 키바키 대통령이 속한 종족으로 최근 야당 후보였던 라일라 오딩가가 속한 루오족의 공격 대상이 됐다. 키쿠유족 역시 복수에 나선 상태다. 지난 27일 수도 나이로비에서 100㎞ 떨어진 나이바샤에선 루오족을 겨냥한 키쿠유족의 잔인한 복수전이 벌어졌다. 5명이 집 안에서 불타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적어도 22명이 숨졌다. 경찰은 방화범들이 주민들을 집에 가둔 채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이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난도질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비비시>(BBC) 방송은 전했다. 종족 간 상호학살로 현재까지 800명 사망에 3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00일 동안 80만명이 희생된 르완다 대량학살 당시 후투족 방송국은 ‘투치족은 바퀴벌레, 바퀴벌레를 박멸하자’는 방송을 연일 내보냈다. 현재 케냐에서도 라디오 방송은 대량학살을 부추기는 선전도구다. 키쿠유족 언어로 방송되는 한 방송국은 최근 ‘(야당 후보) 라일라 오딩가는 살인자고, 권력에 굶주려 있으며, 그가 속한 루오족은 게으르고 도둑질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담긴 노래를 방송했다. 루오족인 오딩가를 지지하는 방송국들도 “키바키 등 개코원숭이들을 몰아내자” “우리의 땅을 점령한 몽구스(사향고양이과의 동물)를 몰아내자” 등의 선동적 구호를 되풀이하고 있다.
젠다이 프레이저 미국 국무부 아프리카담당 차관보는 30일 서구 외교관으로는 처음으로 “케냐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동안 외교관들은 사태 격화를 우려해 특정 지역에서 특정 부족을 몰아내는 것을 뜻하는 ‘인종청소’라는 표현을 피해왔다. 케냐 경찰은 31일 일선 경찰에 용의자에게 총탄을 발사해 사살해도 좋다는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해 사태는 더욱 악화할 전망이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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