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영화 ‘가베’로 본 이란인들의 삶
■ 가베(Gabbeh)
이 영화는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의 1996년 작품으로 국내에는 1998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가베에 얽힌 유목민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베는 카쉬카이족(Qashqai)의 카펫 명칭이자 이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이에 따라 여인의 삶과 카펫을 결합시키고 있다. 흔히 이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페르시안 카펫’이다. 페르시안 카펫은 이란 장인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전통적인 예술품이자 이란의 대표적인 문화적 자산이다.
카펫은 유목 문화의 상징이다. 카펫은 정착민들에게 일종의 사치품이지만 유목민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필수품이다. 거센 모래바람과 밤낮의 기온 차가 큰 사막의 기후 그리고 이동이 잦은 유목민들에게 카펫은 가장 절대적인 생필품이다. 카펫(Carpet)란 용어는 라틴어의 ‘털을 빗질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르피타(Carpita)에서 나온 말이다. 이란에서는 카펫을 ‘펼치다’ 또는 ‘깔다’라는 의미를 가진 파르쉬(Farsh)라고 부른다.
가베는 이란 남서부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카쉬카이족의 전통적인 카펫이다. 이란 인구의 약 23%를 차지하는 투르크어족은 아제리족, 투르크만족, 카쉬카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쉬카이족은 여름철에는 쉬라즈와 이스파한 사이의 고지, 겨울철에는 쉬라즈의 북서부와 동부의 저지대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이다. 가베는 고가의 카펫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상영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페르시안 카펫, 기원전 5세기로 페르시안 카펫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시기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 역사를 통해서 페르시안 카펫은 다양한 예술 형태로 나타났다. BC 539년 아케메니아제국(BC 550-BC 330)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자신의 업적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페르시안 카펫을 예술 형태로 소개했다. 키루스 시대 이전까지 이란인들은 카펫을 예술 형태보다는 실용적인 기능으로 사용했다. 529년 키루스 대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무덤을 카펫으로 덮었다고 한다. 카펫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문서는 중국 문헌에 언급된 사산조(224-641) 시대에 관한 것이다. 페르시안 카펫은 사산조 시대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주요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사산조의 직조 기법은 파르티아인들에게 배웠고 파르티아인들은 중국 한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실크 기법을 습득했다고 한다. 628년 동로마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정복하고 다양한 페르시안 카펫을 가져왔고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637년에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하면서 수많은 페르시안 카펫을 가져와 이슬람문화와 결합시켰다. 당시 가장 유명한 페르시안 카펫은 호스로우 1세(531-579년 재임)의 ‘봄의 카펫’이었다. 그 카펫은 길이 122 미터, 폭 30 미터에 달하는 금실과 은실로 짜인 아름다운 정원이 수놓아 있었고 수천 개의 보석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 카펫은 신에 대한 찬미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시대부터 페르시안 카펫에는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기하학적 무늬가 등장하게 되었다.
페르시안 카펫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투르크족에 의해 성립된 셀죽조(1038-1194)의 탄생이었다. 셀죽조 여성들은 터키 매듭 방식을 사용해 카펫을 제작했다. 카펫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매듭 방식에 있다. 일반적으로 매듭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나 크게 페르시아 매듭 방식(Sinnneh Knot)과 터키 매듭 방식(Ghiordes Knot)으로 구분된다. 페르시아 매듭 방식은 경사에서 실이 한번 돌려진 후 한쪽 실 끝이 실로 나오고 다른 쪽 끝이 날실로 나온다. 반면에 터키 매듭 방식은 실이 두 번 돌려지고 끝이 두 개의 실 사이에서 당겨진다. 셀죽조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아제르바이잔과 하마단 지역에는 오늘날에도 터키 매듭 방식을 사용해서 카펫을 제작하고 있다.
‘페르시안 카펫의 황금기’는 몽골인의 지배에서 독립한 사파비조(1501-1722)에서 나타났다. 이란인들은 사파비조를 통해서 아랍인의 침입 이후 약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조를 다시 열게 되었다. 샤 압바스(1588-1629년 재임)는 왕실 카펫 공장을 설립하여 수많은 예술가들을 고용해 본격적인 카펫 산업을 육성했다. 이 사업에는 카펫 장인 뿐만 아니라 세화공과 시인들도 참여하면서 카펫에 시와 예술을 결합시켰다. 이에 따라 페르시안 카펫은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팔레비조(1925-1979)의 레자 샤(1925-1941년 재임)는 1936년 정부 법령으로 ‘동카펫 제조회사(ECMC)’를 폐쇄하고 새로운 ‘이란 카펫 회사(ICC)’를 설립했다. 당시 ‘동카펫 제조회사’는 외국계 회사로 케르만, 아라크 및 하마단 등 주요한 도시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레자 샤는 ‘이란 카펫 회사’를 통해서 정부 주도의 카펫 사업을 추진했고 그의 아들 모함마드 레자 샤(1941-1979년 재임)는 카펫 박물관을 설립해 페르시안 카펫을 지역별로 구분해 전시하면서 카펫의 발전역사와 현황을 체계화시켰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디자인과 정치적인 주제를 강조했지만 페르시안 카펫 디자인의 다양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 올. 한 올 자연의 색으로 염색
페르시안 카펫의 비밀은 자연색과 재질 그리고 독창적인 디자인에 있다. 페르시안 카펫의 화려함은 동식물에서 뽑아내는 천연 염색을 사용하고 있다. 붉은 색은 이란의 광야에서 자라는 꼭두서니 뿌리와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에서 얻는다. 푸른색은 인디고 나무잎에서 얻고 보다 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발효통에 넣고 숙성시킨다. 노란색은 사막지역에서 야생하는 사프란 꽃을 사용한다. 검은 색은 흑양의 털을 사용해 만든다. 그리고 연두색은 오디 나무에서 얻는다.
이 원료들은 염색공장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공된다. 실을 염색할 때에는 통째로 하지 않고 실 한 올씩 염료통에 집어넣어 바람이나 햇빛으로 건조시킨다. 이때 바람이나 햇빛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색감이 만들어진다. 페르시안 카펫의 재료는 이란에서 생산되는 양모만을 사용한다. 이란의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양모는 부드럽고 광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색이 바래지 않는다. 흔히 봄이 끝나는 시점에 양털을 깎는다. 양털은 깨끗한 물에 씻어낸 후 바람으로 건조시킨다. 말린 양모는 직접 손끝으로 꼬아서 실로 만든다.
페르시안 카펫은 다양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카펫 디자인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첫 번째 형태는 기하학적인 디자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목민의 상징을 활용하여 수직선과 대각선을 결합시킨 형태로 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기하학적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되기도 하고 실제 그들의 삶과 역사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끝없이 연결되는 매듭을 통해 이슬람의 상징을 반영하기도 한다. 두 번째 형태는 곡선과 꽃 무늬 디자인이다. 페르시안 카펫의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중앙의 메달리온 형태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메달리온 디자인이 이슬람사원의 돔 양식에서 영감을 받아서 창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기원을 페르시안 카펫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샤 압바스 시대에서 찾기도 한다. 그 시기 대표적인 디자인은 덩굴손 문양으로 연결된 중앙의 백합 모양이 주류를 차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란에서는 다양한 꽃무늬 디자인이 대중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세 번째 형태는 그림 디자인이고 가장 드문 문양이다. 그림 디자인은 윤곽이나 문양에서 기준이 없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일반적인 카펫 보다 더 많은 정교함과 기술이 요구된다. 이것은 곡선, 원 또는 반복적인 꽃무늬 없이 카펫 직공이 그림을 그리듯이 짜나가는 방식이다.
새 카펫은 시장 바닥에 깔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신은 유일한 창조주이다. “그분은 너희가 보듯 기둥 없이 하늘을 창조하시고 대지 위에 고정된 산을 세워 너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아니 하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 모든 동물이 번성토록 두셨도다 또한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게 하여 그 안에 모든 고상한 식물이 자웅으로 자라게 하셨느니라” (쿠란 31:10)
신이 창조한 자연은 색깔로 나타나고 있다. 가베의 삼촌은 부족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다양한 색깔을 가르쳐 준다. “저건 무슨 색이지?” “하늘색이요.” “천국의 하늘색이지.” “저 색은?” “파란색이요.” “강물의 뿌연 파란색이다.” “저 색은?” “노란색이요.” “세계를 밝히는 태양의 노란색이지.” “태양의 노랑과 물의 파랑이 나무들의 녹색을 만들지. 녹색, 생생한 녹색이지. 노랑과 빨강이 함께 태양에 있다.”
장인들은 신이 창조한 자연을 색깔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찬미하면서 삶을 기록하는 카펫을 짰다. 가베는 유목민의 삶을 반영하듯 단순한 디자인과 색채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베의 디자인은 단순미의 예술 형태이다. 이는 곧 유목민의 삶을 의미한다. 그들은 초원을 지나가면 초록색 배경을 짜 넣으면서 그들의 현실을 그려내고 임신한 여인은 들판에서 뛰어노는 어린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꿈을 옮겨놓는다. 가베는 그것을 짠 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란의 카펫 시장에는 새로 제작한 카펫을 거리마다 깔아 놓고 행인들이 밟고 지나가게 한다. 진정한 카펫은 밟을수록 선명한 색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란에는 ‘카샨산(産) 카펫 같은 여인’이라는 말이 있다. 카샨 출신 여인은 카펫처럼 세상 풍파의 역경 속에도 변함없는 내면의 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안 카펫의 가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색상과 디자인을 그대로 간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다는 것에 있다. 페르시안 카펫은 이란인의 역사, 예술 그리고 영혼이 씨실과 날실의 매듭으로 엮여진 작품이다.
가베를 짜는 여인
가베는 이란 남서부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카쉬카이족의 전통적인 카펫이다. 이란 인구의 약 23%를 차지하는 투르크어족은 아제리족, 투르크만족, 카쉬카이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쉬카이족은 여름철에는 쉬라즈와 이스파한 사이의 고지, 겨울철에는 쉬라즈의 북서부와 동부의 저지대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이다. 가베는 고가의 카펫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상영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페르시안 카펫, 기원전 5세기로 페르시안 카펫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시기는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 역사를 통해서 페르시안 카펫은 다양한 예술 형태로 나타났다. BC 539년 아케메니아제국(BC 550-BC 330)의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자신의 업적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페르시안 카펫을 예술 형태로 소개했다. 키루스 시대 이전까지 이란인들은 카펫을 예술 형태보다는 실용적인 기능으로 사용했다. 529년 키루스 대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무덤을 카펫으로 덮었다고 한다. 카펫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문서는 중국 문헌에 언급된 사산조(224-641) 시대에 관한 것이다. 페르시안 카펫은 사산조 시대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주요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사산조의 직조 기법은 파르티아인들에게 배웠고 파르티아인들은 중국 한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실크 기법을 습득했다고 한다. 628년 동로마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정복하고 다양한 페르시안 카펫을 가져왔고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637년에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하면서 수많은 페르시안 카펫을 가져와 이슬람문화와 결합시켰다. 당시 가장 유명한 페르시안 카펫은 호스로우 1세(531-579년 재임)의 ‘봄의 카펫’이었다. 그 카펫은 길이 122 미터, 폭 30 미터에 달하는 금실과 은실로 짜인 아름다운 정원이 수놓아 있었고 수천 개의 보석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 카펫은 신에 대한 찬미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시대부터 페르시안 카펫에는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기하학적 무늬가 등장하게 되었다.
카펫시장
카펫을 짜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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