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에 당한 듯 다리 잃은 주검이…

시위대가 장악한 벵가지
현장 동영상 인터넷 전파
카다피 거점 트리폴리선
용병들 총쏘며 공포 조성

23일(현지시각) 리비아 벵가지 해안에 위치한 비밀경찰 본부 안마당은 온종일 분주했다. 군데군데 검게 그을린 건물 앞 버려진 탱크 위에선 아이들이 뛰놀았다. 이탈한 군인들과 관료들은 마당 한편에 차곡차곡 무기를 쌓아올렸다. 플라스틱 폭탄, 로켓, 기관총, 심지어 대공화기도 눈에 띄었다. 전쟁에나 쓰일 법한 온갖 무기는 지난 주말 민간인 학살에 쓰였던 도구들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이날 보도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충견’들을 몰아내고 해방구가 된 벵가지엔 아직 죽음의 그림자가 다 걷히지 않았다.

리비아에서 둘째로 큰 도시인 벵가지 곳곳엔 학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시내 알자라 병원 근처 시체안치소에서 일하는 필리핀 출신 잡역부가 한 군인의 주검을 닦고 있었다. 의사는 숨진 병사가 군 동료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가 카다피의 용병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고 전했다. 그는 <가디언>에 “이 병원에서만 17일 이후 65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파타는 카다피의 친위대와 시위대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군부대 안 막사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저기에 고사포가 있었고, 그 건너편에선 죽은 아프리카 용병들의 주검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진 어린아이의 주검 등을 담은 참혹한 영상들도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외부로 전해지고 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공개한 한 동영상에서는 전투기 폭격이나 탱크 등 중화기에 의해 다리가 거의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는 주검들이 벵가지 시내 한 병원에 눕혀져 있었다.

리비아 민주화 시위의 진원지인 벵가지에선 카다피의 유혈진압으로 최소 230여명의 사망자와 1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날 벵가지의 광장엔 수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피의 대가로 얻은 ‘자유’에 환호하는 모습을 <시엔엔>(CNN)이 전했다. 벵가지는 이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인민위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병원과 정부 건물엔 69년 카다피의 혁명 전 이드리스 왕정 때 사용했던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삼색기가 내걸렸다. 일부 시민들은 에이케이(AK) 소총 등으로 무장했다. 사드 아흐메드(24)는 “우리가 큰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벵가지에서 서쪽으로 1000㎞ 떨어진 수도 트리폴리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날 카다피가 방송에서 “피 한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사항전 태세를 밝힌 이후, 그의 용병들과 무장한 지지자들이 거리에 나와 공포를 조성하고 있다. 이들은 허공에 총을 쏴대면서 카다피의 무병장수를 외치기도 했다. <에이피>(AP) 통신은 도심 곳곳에 탱크가 배치되고 바리케이드가 쳐졌다고 전했다. 시민들은 저격수들이 총을 쏠까봐 문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카다피는 점점 고립무원이다. 반정부 시위대는 23일 리비아 제3의 도시인 미수라타를 접수한 데 이어, 24~25일에는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리비아 시위 사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류이근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