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 아메드 압둘 파타 사다
은신처에서 총상 입은 아내
2000년초 아버지 앞서 맹세
2000년초 아버지 앞서 맹세
“당신과 함께 순교할 거예요. 당신이 살아있는 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래요.”
지난 2일 미군이 오사마 빈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했을 때 남편과 함께 있다가 총상을 당한 빈라덴의 아내(아말 아메드 압둘 파타 사다)는 신혼 시절인 2000년 초 아프간의 한 동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다의 아버지는 11년 전이 마지막이었던 딸과의 만남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다는 현재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12살짜리 딸 사피야과 함께 파키스탄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에이피>(AP) 통신은 예멘 수도 사나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한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사다의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11일 보도했다. 가족들은 사다가 “평범했지만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었으며 종교적으론 보수적이었지만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고졸 중퇴 학력이었지만 지적 욕구가 강하고 인생에 주어지는 평범한 것 이상의 뭔가를 깨닫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에겐 항상 “난 역사에 기록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사다의 삶은 1999년말 형부이자 빈라덴의 친구인 모하메드 갈리브 바니가 빈라덴의 밀사인 라샤드 모하메드 사에드와 함께 사다의 삼촌 집을 찾아오면서 운명적 계기를 맞았다. 빈라덴이 신부감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갖고 온 것이다. 사다의 가족은 당시 빈라덴이 1998년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 테러 사건으로 수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네 미래이니 네가 선택하라”는 삼촌의 말에, 17살 사다는 “신이 결정한 운명이니,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몇주 뒤 사다의 삼촌은 후견인 자격으로 결혼 계약에 서명했고, 예멘 풍습에 따라 사다의 가족은 빈라덴 쪽으로부터 5000달러를 받았다. 얼마 뒤 사다는 두바이와 파키스탄을 거쳐, 빈라덴이 은신하던 아프간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이듬해 말께, 사다의 아버지는 딸이 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다의 가족들은 딸을 보기 위해 멀고도 비밀스런 여행길에 올랐다. 아프간 국경 지대에서 무자헤딘(아프간의 이슬람 무장세력)의 안내로 차를 갈아탄 끝에, 이들은 사다와 빈라덴이 사는 어느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식구들은 21발의 축포와 성대한 점심으로 환영해주었다고 했다.
빈라덴은 이자리에서 시리아 출신의 다른 아내와 사다에게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며 “(아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다는 남편과 함께 할 뜻을 분명히 한 뒤, 아버지에게 “아프간에서 동굴을 전전하는 게 내 삶이지만 오사마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다의 아버지는 “빈라덴은 고귀하고 온화한 사람이었으며 신실한 느낌을 주었다”고 사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상을 회고했다. 사다의 삼촌은 빈라덴이 “나는 부상당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내가 여생을 살고 있는 건 신이 원하기 때문”이라며 “세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이후 9·11 테러가 일어나자 사다의 아버지는 “빈라덴이 한 일이군”이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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