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카다피
생포된 최측근 사령관 밝혀
전투 지휘도 모두 아들들이
전투 지휘도 모두 아들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반군에게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된 뒤에도 “리비아 국민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는 측근의 증언이 나왔다.
1980년대부터 카다피의 개인경호를 맡아오며 카다피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었던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 전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이 25일 <에이피>(AP) 통신 등 3개 언론사에 전한 얘기다. 그는 카다피의 측근들이 카다피에게 권좌에서 물러나 리비아를 떠날 것을 권유했지만 “카다피는 상황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은 카다피가 숨진 20일 생포됐으며, 현재 리비아 과도정부에 의해 미스라타의 한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카다피가 수도 트리폴리를 떠난 것은 지난 8월18일이나 19일께다. 반군이 아직 트리폴리까지 진격하지 못한 시점이다. 당시 카다피는 고향 시르트로, 후계자로 꼽힌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은 바니왈리드로 떠났다고 그는 말했다.
40년 넘게 자신이 호령해왔던 나라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뒤, 카다피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가끔은 미친 사람 같기도 했다”는 게 이브라힘의 전언이다. 또 카다피는 전쟁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모든 전투는 그의 아들들이 지휘”했던 걸로 알려졌다.
‘최후의 순간’에 대한 얘기도 풀어놨다. 카다피를 비롯해 이브라힘 등 측근들은 20일 40개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새벽 3시께 시르트를 떠날 예정이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돼 오전 8시께나 돼서야 시르트를 출발했다고 그는 전했다. 하지만 그는 출발 직후 나토군의 공습을 받았고, 인근 농장을 거쳐 도로로, 배수관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공습 당시 유산탄을 맞아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깨어보니 병원이었다며, 당시 카다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다피의 최측근 한 여성은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 카다피가 생포됐을 당시 부상이 경미했다고 밝혀, 카다피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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