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33년 독재자 퇴진 이후
1500명 학살 ‘면책특권’ 등 인정·개혁방안 보장 없어
시민 “정치가·외세, 혁명 가로채”…권력투쟁 가속화
1500명 학살 ‘면책특권’ 등 인정·개혁방안 보장 없어
시민 “정치가·외세, 혁명 가로채”…권력투쟁 가속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23일 ‘조건부 퇴진’을 뼈대로 한 걸프협력회의(GCC)의 중재안과 유엔의 이행방안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33년째 집권해온 세계 최장기 독재자가 기소 면제를 조건으로 대통령직 양도를 공약한 것이다.
살레와 예멘 야권이 공동서명한 중재안이 발효됨에 따라, 9개월째 민주화 시위대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점철돼온 예멘 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살레가 중재안을 실제로 이행하면 올초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 시위로 물러나는 네번째 최고권력자로 기록된다. 유엔과 아랍권, 미국과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는 일제히 살레의 중재안 서명을 환영하고 합의사항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중재안을 보면, 살레와 그 가족, 측근들에 대한 면책특권을 보장한 반면, 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민주화 이행 방안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지금까지 15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언급조차 없다. 야권과 합의된 중재안이라지만, 예측하기 힘든 ‘정치적 시한폭탄’을 내장한 셈이다.
외신들이 전한 중재안을 보면,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이 헌법적 권력을 승계받는다. 향후 90일 안에 권력분점 정부 구성, 임시총리 지명, 무장 해제,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 실시 등 숨가쁜 정치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살레는 대선 때까지 명목상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된다.
문제는 이같은 중재안이 예멘의 정치적 안정과 민주화, 치안 회복 등 어느 하나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살레 퇴진 이후에도 구체제의 기득권층이 권력 핵심부에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90일 안에 치러질 대선에는 하디 부통령이 여야 정치권의 추대 형식으로 단독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살레의 최측근이 차기 대통령을 예약해둔 셈이다. 하디는 집권 이후 권력분점을 위한 의회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도입, 상하 양원제로 권력구조 개편 등 개헌을 주도할 것이라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전했다.
예멘 시위대는 정치 엘리트 집단과 외세가 민중혁명을 가로챘다며 반발하고 있다. 23일 수도 사나의 시위 중심지인 ‘변화의 광장’에 나온 함자 알카말리(23)는 <뉴욕 타임스>에 “우리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어떤 협정도 인정할 수 없으며, 우리는 계속 광장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정파와 무장세력이 벌이는 권력투쟁도 격화할 전망이다. 살레가 33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구축한 정치파벌과 군부는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이다. 특히 살레의 아들 아흐메드 알리는 시위대 학살을 주도한 정예 혁명수비군 사령관 자리를 꿰차고 있다.
다른 한 축에는 예멘의 유력 토호세력이자 아흐메드 알리의 라이벌인 알리 모흐센 아흐마르 가문이 있다. 예멘 정부군 장군 출신인 아흐마르는 지난 3월 예멘 민주화 시위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시위대에 합류해 반정부 무장투쟁을 펼쳐왔다.
알카에다 조직의 최대 실세인 알카에다아라비아반도지부(AQAP)도 지난 2009년부터 중동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치안공백 상태인 예멘에 본부를 두고 급속히 세력을 키워왔다. 더욱이 이라크 주둔 미군이 올해 말까지 철수를 완료할 예정이어서, 이 지역이 테러리즘의 전진 기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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