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중동 지도를 그린 ‘주역’ 가운데 한명이자, 이스라엘의 대표적 강경 우파 정치인인 아리엘 샤론 전 총리가 11일 사망했다. 8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로 지내온 그는 이날 장기 부전에 따른 심장마비로 숨졌다.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샤론의 일생은 중동 분쟁을 확산시키고, 이를 봉합하려다 실패한 여정이었다. 현재 중동평화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된,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 지은 이스라엘 정착촌을 처음 추진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엔 정착촌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벌인 대표적인 전쟁과 학살들에 관여한 그는 말년엔 팔레스타인 등과의 협상에 적극 나섰으나, 강경파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샤론은 1928년 현재 그의 이름을 따 샤론계곡으로 불리는, 텔아비브 인근 마을의 유대인 집단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민한 러시아 출신의 1세대 유대인 이민자이자, 시오니스트 지도자였다. 유대인 이민자와 아랍 주민들과의 충돌이 계속된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샤론은‘힘만이 생존을 보장한다’는 이스라엘 건국 세대의 전형적 가치관을 확고히 했다. 그는 고등학생 민병대조직인 가드나에 들어가면서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민병대이자 이스라엘국방군의 전신이 되는 하가나에 가담해 독립전쟁에 참여한다. 독립전쟁이 절정이던 1948년 5월 그는 요르단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수시간 동안 피를 흘린 채 방치돼 사선을 넘는 경험도 했다.
1953년 10월 키브야 전투는 군인으로서의 샤론의 명성과 악명이 시작된 계기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집에서 잠자던 엄마와 아이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샤론은 그 보복으로 101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이끌고 요르단의 키브야 마을을 급습했다. 당시 살해된 민간인 69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45채의 가옥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처음으로 공식 비난을 받게했고, 전 세계 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가 도화선이 된 1956년 중동전쟁에서 샤론은 이스라엘 정부와 서구 열강들이 합의한 작전 지역을 넘어 거침없는 작전을 벌여, 이스라엘 정부를 당황케 했다.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인 당시 참모총장 모세 다얀은 샤론의 작전이 불필요한 잔학성을 보였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입지를 굳힌 1967년 6일전쟁 때 북부지구 사령관이던 샤론은 이집트 전선을 돌파하는 결정적 공을 세워, 전쟁영웅으로 부상한다.
1970년 남부지구 사령관이던 샤론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몰아내고 주택과 묘지들을 밀어버린 뒤 이곳에 첫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 정착촌 건설이 이후 중동평화 협상을 방해하는 최대 걸림돌이 될지는 그때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군에서 전역하려던 샤론은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의 위기에 몰리자 다시 군으로 돌아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작전으로 이집트군을 교란했다.
그는 전역한 뒤 베나헴 베긴과 함께 우파 리쿠드 연합을 창설해, 1973년 의회에 들어갔다. 1977년 농업장관으로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정착촌 건설 계획을 본격화했다. 1982년에는 국방장관으로서 레바논내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에 개입해 중동분쟁을 악화시킨 ‘주범’이 됐다. 그가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은 1982년 6월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기지를 분쇄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베이루트를 점령한 상황에서 그해 8월 베이루트 인근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800~2000명의 난민들이 레바논의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에 의해 학살당했다. 샤론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으나, 팔랑헤 민병대가 이스라엘의 지시에 따라 난민촌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후 2선으로 물러났던 샤론은 2001년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타 봉기로 이스라엘 내에서 안보우려가 높아진 상황을 배경으로 리쿠드당이 압승하면서 총리로 등극했다. 사실 2차 인티파타도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성지인 모스크를 샤론이 무단으로 방문하면서 터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중동평화 노력의 최대 결실인 오슬로평화협정에 의거한 중동평화 협상도 파탄났다.
총리로 올라선 샤론은 그전까지 중동분쟁 확산의 주역이었던 행보를 갑자기 바꿨다. 비둘기파인 시몬 페레스 전 총리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거국내각을 꾸린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불가피하다며 협상과 분쟁 봉합에 나선다. 자신의 앞선 행보로 최악에 처한 중동분쟁의 상황에서 그는 “한세기에 걸친 분쟁에서 평화가 도출될 수 있다면 나는 그 대장장이가 될 것이다”는 말로 리쿠드당의 강경 우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5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주민들과 군대를 철수시켰고, 서안지구 일부에서도 같은 조처를 취한다. 당시 이 조처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비견되는 대전환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서안지구를 온통 가로지는 700km 상당의 정착촌 장벽을 건설하는 미봉책도 덧붙혀, 정착촌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리쿠드당 및 우파들의 반발이 거세자 그는 탈당해 중도 카디마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변신까지 꾀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 누운 가운데 치러진 2006년 선거에서 카디마당은 압승했다. 하지만, 2009년 그의 숙적으로 변한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의 리쿠드당이 승리하면서, 그의 정치인생도 사실상 종결된다.
그의 최측근인 라난 기신은 <뉴욕타임스>에 “샤론은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정치적 설계자”고 말했다. 기신은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원동력이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샤론은 평화가 불가능할지라도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자신의 조건에 맞추고자 했고, 자신이 집권했을 때 그렇게 했다”고 그의 일생을 요약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