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르완다 대학살을 기적처럼 견뎌낸 느다히노 패트릭(23)이 6일 오후 르완다 수도 키갈리에서 남쪽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은타라마 대량학살 기념관에서 희생자들의 유골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당시 3살이던 패트릭은 부모를 포함한 가족 4명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가끔 가족이 생각날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는 그는 “어렸지만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은타라마기념관은 원래 성당이었다. 투치족 주민 5천여명이 이곳에서 한꺼번에 학살된 뒤,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 채 지금은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00일간 100만명 참화
아물지 않은 상처 곳곳
무장 군인들 삼엄경비
아물지 않은 상처 곳곳
무장 군인들 삼엄경비
※퀴부카 : 그날을 기억하라
‘100일간의 참극’을 기리는 날, 7일 오전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아침은 차분했다. 주요 행사장 근처에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소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지키고 서 있었지만, 1500m 고산지대인 시내 기소지에 있는 대학살 추모관 주변은 여느 아침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도시의 아침 기온은 약 17℃.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저 멀리서 달려온 구름이 잠시 도시를 맴돌더니 이내 제 갈 길을 가버린다. 아스팔트 포장이 없는 황톳빛 간선도로에선 상큼한 흙냄새가 났다.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인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착륙을 준비하던 중 격추되면서 촉발됐다. 이튿날부터 르완다 인구의 85%를 차지한 후투족이 소수인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박멸’에 나섰다.
손도끼와 정글용 칼이 ‘대량살상무기’였다. 후투족 무장세력은 투치족과 그들을 도운 일부 동족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피의 살육은 폴 카가메 현 대통령이 이끈 투치족 반군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이 그해 7월15일 키갈리를 장악할 때까지 이어졌다. 100일 동안, 줄잡아 80만~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분마다 6명씩 스러진 셈이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마찬가지로, 르완다 대학살의 뿌리도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이래 르완다 땅에선 유목민 출신인 소수 투치족이 주로 농업에 의존해 온 다수 후투족을 지배했다. 식민 지배자들은 코의 길이를 재 인종적 우월성을 감별했단다. 투치족은 지배계급화했고, 후투족은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분할통치’이자, 인종분리 정책이었다.
1962년 독립과 함께 선거를 통해 후투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후투족의 보복 폭력이 불을 뿜으면서, 이후 10여년 동안 줄잡아 2만여명의 투치족이 목숨을 잃었다. 우간다 등 이웃나라로 몸을 피한 투치족은 반군단체 ‘르완다애국전선’을 꾸리고, ‘귀환’을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 투치족 반군의 존재는 후투족을 단결시키는 힘이었고, 지배자들은 이를 독재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1993년 오랜 분쟁을 딛고 하비아리마나 정권과 애국전선 사이에 평화협상이 타결됐지만, 혼란은 계속됐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된 직후 후투 집권층은 기다렸다는 듯 투치족 말살에 나섰다. 이때 투치족 10명 가운데 1명꼴로 목숨을 잃었으니,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국제사회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후투-투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 1993년부터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벨기에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르완다지원단(UNAMIR)은 학살극이 한창일 때 ‘신변안전’을 이유로 되레 병력을 줄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극을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참극을 경험하고도,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키갈리를 장악한 투치족 반군은 후투족 출신인 파스퇴르 비지뭉구를 대통령으로 내세웠지만, 정국을 주도한 것은 반군 지도자 출신으로 총리에 오른 폴 카가메였다. 애초 후투-투치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카가메는 2000년 4월 아예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투치 단독정부를 구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일 저녁, 키갈리의 아마호로(평화) 경기장으로 횃불이 들어왔다. 대학살 20주년을 맞아 지난 1월7일부터 올림픽 성화처럼 르완다 전역 30여곳을 돌아온 ‘화합의 불꽃’이다. 살육의 세월을 용케 견뎌낸 이들은 손에 촛불을 켜들었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되풀이된다, ‘퀴부카!’(Kwibuka·기억하라).
키갈리/글·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대학살 20주년, 아픈 과거를 딛고 조금씩 미래로 나아간다. 6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 시내 곳곳에서 마주친 광고판은 최근 이곳에서 스마트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7일 오전(현지시각)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아마호로(평화) 경기장에서 열린 대학살 20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생존자들이 하얀 꽃 한송이씩을 들고 운동장을 걷고 있다.
1994년 대학살 당시 5천여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은타라마 기념관에 당시 희생자들이 신고 있던 신발이 전시돼 있다.
‘퀴부카,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라!’ 르완다 대학살 20주년을 맞은 7일 오전(현지시각) 수도 키갈리의 아마호로(평화) 경기장에서 대규모 추모행사가 열렸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다수 종족인 후투족이 100일 동안 소수 종족인 투치족을 무차별 살해해 최대 100만명이 숨졌다. 20세기 인류의 양심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날 경기장은 대학살 때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한 맺힌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이 탈진하자 구호요원들이 옮기고 있다. 키갈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봉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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