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밀라 자말(42)은 서럽게 울었다.
생각보다 훨씬 처참한 폐허로 변해버린 집 앞에서 며칠 전 잃은 가족들 생각이 밀려든 듯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동부 샤자이야에서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남편과 12살 딸을 잃고 대피소에 머물던 그는 지난 26일 12시간의 임시휴전이 발표되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 20일 하루 만에 샤자이야 마을 한 곳에서 7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피의 일요일’,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난민들은 이날 임시휴전을 맞아 가재도구를 챙기러 황망히 마을로 돌아갔지만, 보이는 모든 것이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어디가 길이고, 어느 집이 누구 집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임시휴전이라고는 하지만 머리 위로는 무인정찰기가 끊임없이 맴돌며 감시했고, 바로 옆 국경의 이스라엘군은 가깝게 접근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며 위협사격을 했다. 자말을 비롯한 주민들이 상심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언제 갑자기 폭격이 재개될지 몰라 서둘러 다시 대피소로 향했다. 많은 주민들은 자기 집도 찾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피난소에 돌아왔다.
한 여성은 샤자이야의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를 뒤져 난민생활에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기기도 했다. 가자지구/김상훈 강원대 교수
주민들은 처음엔 친척집으로 대피했지만, 그곳도 위험해지자 유엔이 임시대피소로 지정해 운영하는 학교 건물로 피해 있었다. 어떤 이는 모스크로 대피했고, 어떤 이는 교회의 문도 두드렸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도망이 계속됐고, 가자지구의 전체 인구 180만여명의 약 25%인 42만5000여명이 피난민이 됐다.
하지만 이제 가자지구에 안전한 곳은 한 군데도 남지 않았다. 30일 새벽엔 유엔이 대피소로 운영하는 여학교에 포탄이 날아들어 잠들어 있던 피난민 19명이 숨지고 120여명이 다쳤다. 유엔은 “전세계적인 수치”라며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이날 오후엔 샤자이야의 시장에도 포탄이 날아들어 생필품을 사러 나왔던 15명이 숨지고 150여명이 다쳤다. 가자지구의 유일한 화력발전소도 파괴됐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던 아이들을 폭탄이 덮쳤다.
지난 24일 유엔이 피난민 대피소로 운영하던 학교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부상당한 이들이 베이트라히야의 카말 아드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부상자는 많고 공간은 비좁아 커튼으로 칸막이를 했다. 가자지구/김상훈 강원대 교수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라히야에 살고 있는 대학생 샤디는 왜 대피소로 피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대피소라고 더 안전한 것도 아니고, 전기나 물이 부족한 대피소에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했다. 베이트라히야의 임시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대학생 아부는 이렇게 말했다. “집 근처에 폭격이 심해 일단 이곳에 오긴 했지만, 전기나 물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불편한 것에 익숙해진 건 이미 오래됐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때문에 가자지구는 집이건 대피소건 모든 곳이 감옥이다. 대피소에서 불편한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으니 이 전쟁을 끝까지 해서라도 봉쇄정책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천장 없는 감옥’으로 불린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폭 1㎞ 정도의 완충지대와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24시간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 국경수비대로 포위돼 있고, 이집트로 이어지는 남쪽으로는 장벽과 철조망 그리고 이스라엘 국경수비대의 높은 감시탑이 서 있다. 서쪽 지중해에선 이스라엘 군함이 제한구역에 다가가는 어선을 향해 수시로 기관포와 함포를 쏘면서 철통봉쇄하고 있다. 2002년엔 해안에서 12해리까지 어업이 허용됐지만, 2006년 4월에는 10해리, 2009년에는 3해리로 어업 구역이 계속 줄었다.
이스라엘로 통하는 다섯 개 국경검문소 중 세 곳은 폐쇄돼 지금은 두 곳만 제한적으로 운용되고 있는데, 남쪽 케렘 샬롬 검문소는 화물만 통과할 수 있어 북쪽의 에레즈 검문소가 유일하게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에레즈 검문소는 가끔 구호단체나 유엔 관계자, 외신기자들이 드나들 뿐,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바늘구멍만큼 좁은 통로다. 외부로 나가려면 가자지구 내 병원에서 치료하기 힘든 중환자, 이스라엘에서 취업하는 등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와 절차는 너무 복잡하고 신청해도 반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경검문소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닫히기 일쑤다.
이스라엘이 무차별 폭격을 한 지난 29일 이스라엘군이 쏜 조명탄이 가자시티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가자지구/김상훈 강원대 교수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공습이 없을 때에도 거대한 난민수용소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대를 이어 절망적인 삶을 이어왔고, 이스라엘의 공격은 주기적으로 계속돼 왔다. 지난 8일 또다시 공습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20여일 동안 평균 너비 8㎞, 길이 약 40㎞ 남짓의 이 좁은 땅에 4100t이 넘는 폭탄을 퍼부었다. 30일까지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1360명이 숨졌다. 천장 없는 감옥에 살던 이들이 감옥 안으로 떨어지는 미사일과 포탄을 피해 더 좁은 감옥으로 들어가고, 그 좁은 감옥까지 포탄이 쫓아오는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8일 가자지구에 들어와 취재를 시작한 뒤, 여러 번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베이트라히야에서 취재를 위해 이동하던 길에 차량 근처로 박격포탄이 떨어진 적도 있고, 사진작업을 하고 있던 가자시티의 호텔 로비에서 30~40m 거리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호텔 근처의 가자 항구가 폭격을 당할 때는 유리창이 깨지면서 폭압 때문에 넘어졌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은 사진가로서 다른 이의 고통을 자세히 목격해야 하는 것이었다. 포탄의 날카로운 파편에 얼굴이 찢어져 병원에 실려 오는 어린 소녀가 짐승처럼 울부짖는 표정,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한 어머니의 풀린 시선, 아이 둘을 한꺼번에 잃고 울부짖다 발작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떨리는 팔다리, 온 가족을 잃어 한순간에 고아가 됐지만 아직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어린아이의 미소를 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 했지만 매일 수십, 수백 명의 고통을 눈으로 빨아들이면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보름 남짓이다. 나는 이 잠깐의 고통을 선택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고통은 선택이 아니고, 기간도 정할 수 없다. 전쟁은 당장 멈춰야 한다. 그러나 이 폭격이 지나간다 해도 이들은 이 폐허 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김상훈 강원대 교수·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