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국가’(IS)가 국가로 살아남는다면 6월29일은 건국 기념일이 될 것이고, 6월5일은 건국전쟁 선포 기념일이 될 것이다. 지난 6월5일부터 29일까지는 이슬람국가가 실질적으로 형성된 시기다. ‘국가’, 그것도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모든 무슬림들의 ‘칼리프 국가’가 불과 한달도 안 되는 시간에 이뤄졌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국가는 시리아 동북부와 이라크 북부 지역의 거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도대체 이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중동 지역의 여러 모순과 난맥상이 응축되다가 이 시기에 폭발한 결과가 이슬람국가 선포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중동의 세력 공백→이라크 내 수니파 소외→이라크 내전→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생존→시리아 내전과의 연동→중동 지역 수니파와 시아파 국가의 대립→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권의 방조로 인한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득세→누리 말리키 총리가 주도한 이라크 시아파 정부의 무능과 종파적 운영→이라크와 시리아 내 모든 수니파의 연대→수니파와 외국 출신 지하디스트(성전 전사)들의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로의 결집→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의 6월 대공세와 영역 확장→이슬람국가 선포로 이어지는 수순이었다.
6월 대공세 전까지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안정적 기반은 현재 이슬람국가의 수도로 불리는 시리아 동북부의 락까뿐이었다. 2013년 말까지는 그 활동 무대가 시리아 동북부 지역이었는데, 이마저도 누스라전선 등 다른 세력들과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2013년 12월부터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는 이라크 영내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이라크 내전에서 수니파의 거점이던 팔루자와 라마디 등을 2014년 1월 들어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도 낮에는 정부군 등 다른 세력이 득세하고, 밤에만 그들이 득세하는 전형적인 게릴라식 점령이었다.
하지만 2013년 12월부터 이라크의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말리키 총리의 시아파 중심의 극단적인 종파적 통치에 분노한 수니파 부족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궐기한 것이다. 말리키 정부는 곧 반격 공세를 준비했다. 이때까지도 많은 수니파 지도자들은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 등 알카에다 세력에 여전히 염증을 느끼고 말리키 정부의 소탕작전을 지지했다.
하지만 말리키 총리의 종파적 발언이 불을 질렀다. 그는 안바르주에서 진행된 수니파 반군 세력에 대한 정부군의 반격 공세를 “후세인 추종자와 야지드 추종자 사이의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후세인은 시아파의 원조이고, 야지드는 후세인을 패퇴시킨 우마이야 왕조의 2대 칼리프다. 둘 사이의 전쟁은 이슬람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리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 발언은 안바르주에서 모든 수니파를 격동시켜, 일거에 반말리키 전선으로 뭉치게 했다. 말리키 정부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이라크 내의 수니파 본거지에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가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시리아에서도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는 ‘점령된 영토 내에서 이슬람 통치 수립’을 내걸고 지지자들을 더 모았다. 이는 ‘아사드 정권 타도’를 최우선으로 내건 누스라전선과 대비됐다. 종파분쟁에 위협을 느낀 수니파와 극단주의 성향의 외국 출신 이슬람주의 세력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 쪽으로 몰린 것이다.
시리아 동북부에서도 기반을 강화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는 드디어 6월5일 이라크 중부 사마라를 전격 점령하면서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튿날인 6일에는 이라크 제2도시 모술도 공격해 일부를 점령하면서 일약 국제정세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사흘 뒤인 9일 밤 정부군은 모술에서 퇴각하며 사실상 패주했고, 10일 모술은 함락됐다. 이후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바그다드 쪽으로 진군하며 영역을 급속히 확장했다.
사마라와 모술을 함락했을 당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의 병력은 많아야 2000~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000명도 되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그런데도 주요 도시들이 이들에게 맥없이 넘어간 것은 이라크 정부군의 자멸적 붕괴가 원인이다. 많은 이라크 정부군 지휘관들은 도주하거나 전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정부군의 붕괴에는 사담 후세인 시절의 장교와 병사들의 태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는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가 지도자로 올라선 이후부터 사담 후세인 치하의 군사, 정보 장교 등 바트당 세력을 흡수하면서 모든 수니파와의 연대 기반을 다졌다. 이라크 내 바트당 지하세력인 나끄슈반디군을 비롯해 수니파 부족 민병대들도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진군 지역에서 봉기해 이들을 도왔다. 안바르주 내의 친서방 수니파 부족 세력 연대인 ‘어웨이크닝(각성) 위원회’와 그 민병대까지도 봉기에 참가했다.
이라크 정부군의 붕괴는 충격적이었다. 6월15일 티크리트 탈환을 위한 정부군의 공세에 동원된 공격 헬기는 1대뿐이었다. 이라크의 한 전직 장관은 “정말로 초현실적이었다”며 “도대체 이라크 정부가 최근 몇년 동안 구입했던 140대의 헬기는 어디로 간 것이냐”고 한탄했다. 나머지 139대의 헬기는 정부군이 분실했거나, 애초부터 예산을 빼돌리고 구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는 나중에 블랙호크 헬기까지 동원했다. 자발적으로 전투에 나선 시아파 민병대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식량을 지급받지 못해 굶주리고, 자신의 돈으로 총과 탄약까지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6월29일 이슬람·레반트 이슬람국가의 지도자 바그다디는 이슬람국가(IS) 창설을 선포했다. 영국보다도 더 큰 영토, 스칸디나비아 3국과 덴마크를 합친 인구, 모술 중앙은행에서 확보한 5억달러의 현금, 매달 최소 1200만달러의 세금을 비롯해 장악한 유전의 석유 밀매를 통해 얻는 막대한 수입, 정부군이 버리고 간 탱크와 헬기, 장갑차 등 미국산 첨단 장비, 그리고 밀려드는 외국의 이슬람주의 전사들이 이슬람국가의 탄탄한 기반이다. 이슬람주의 무장세력들의 네트워크 조직인 알카에다, 아프간 주민들의 정권에 그친 탈레반 정부를 훨씬 뛰어넘는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신기원이었다.
이슬람국가는 자체 역량이 아니라 주변 정세의 산물이다. 이슬람국가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무슬림들의 공동체인 ‘칼리프 국가’로 안착할지 여부도 주변 세력들의 대응에 달려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이슬람국가(IS)는 어떻게 건설됐나
(상) 알카에다 잔당이던 IS, 미국 중동정책 실패·종파분쟁이 키워 (중) 락까 점령뒤…IS, 샤리아 통치 반대자 처형하며 세력 키워 (하) 초유의 ‘칼리프 국가’를 만든건 8할이 주변정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