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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무능한 중앙정보국

등록 2014-12-14 20:08

가혹한 고문에 열올리고
정작 정보 획득은 실패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미 중앙정보국(CIA) 본부 로비.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미 중앙정보국(CIA) 본부 로비.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3월28일 파키스탄 파이살라바드 도심의 한 가옥을 파키스탄군이 습격했다. 총격전 끝에 한 인물이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알카에다의 조달책인 아부 주바이다였다. 9일 발표된 미국 상원의 ‘중앙정보국 구금·신문 보고서’에서 대표적 고문 사례로 거론된 인물이다.

보고서가 밝힌 것처럼, 중앙정보국(CIA)의 ‘강화 신문’ 기법, 즉 고문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유용한 중요 정보들을 거의 얻지 못했다. 유용했던 정보들은 대부분 자수한 용의자들이나 연방수사국(FBI)이 얻어냈다. 강압적 신문을 금지하는 미국 국내법의 규제를 받는 연방수사국은 ‘관계구축 신문’ 기법으로 용의자들한테서 중요한 정보들을 캐냈다. 주바이다는 중앙정보국의 ‘강화 신문’과 연방수사국의 ‘관계구축 신문’이 갈등한 대표적 사례였다.

주바이다는 당시 미국 당국이 보기에 9·11 이후 생포한 최고 거물 용의자였다. 그는 9·11 이후 중앙정보국의 비밀 해외 안가에 처음으로 구금된 인물이기도 했다. 타이(태국)에 구금된 그를 처음 신문한 것은 연방수사국 특별수사관 알리 수판이었다. 9·11테러 당시 예멘에서 아덴만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함정을 겨냥한 자살테러 사건을 수사하던 수판은 예멘 감옥에 수감돼 있던 오사마 빈라덴의 경호원 아부 잔달을 신문해 9·11테러 용의자들의 신원을 확인했다. 아랍어에 능통한 아랍계 미국인인 수판은 당뇨병을 앓는 잔달에게 무설탕 쿠키 등을 제공하며 관계를 쌓은 뒤 일주일 만에 알카에다 조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냈다.

주바이다를 심문하게 된 수판은 그의 어머니가 부르던 아명인 ‘하니’라고 부르며, 일주일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이런 접근은 곧 빠른 성과를 냈다. 주바이다는 수판이 제시한 알카에다 대원들의 사진을 보다가 9·11테러 기획자인 칼리드 무함마드를 ‘묵타르’라고 지칭했다. 수판은 알카에다 비디오에서 빈라덴이 ‘미국 고층 빌딩’ 공격 계획을 세운 인물로 묵타르를 지칭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무함마드가 9·11테러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파악했다. 이는 9·11테러 수사에서 가장 큰 성과였고, 주바이다가 제공한 최대 정보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러나 수판은 신문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주바이다를 알카에다 최고위층으로 오판한 백악관 법무실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고 ‘유사 고문 기법’ 사용을 승인했다. 이때부터 중앙정보국이 하청한 이른바 ‘심리전문가’들이 심문을 주도했다. 180시간, 즉 일주일간이나 잠을 안 재우고, 뺨을 때리고, 여성 앞에서 나체로 노출시키고, 좁은 상자에 가뒀다. 83차례나 물고문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극심한 고문에도 주바이다는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내놓지 못했다. 알카에다의 단순한 조달책에 불과했던 그는 무함마드의 암호명 이상의 정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문 기법에 반대하던 수판 등 연방수사국 수사관들은 두달 만에 신문에서 철수했다. 중앙정보국 쪽이 요구하기도 했고, 그들도 이런 고문 현장에 더는 연루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중앙정보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연방수사국은 구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국은 미국 국내법이 미치지 않는 해외에서 용의자들을 처리했고, 이는 연방수사국의 개입을 원초적으로 차단했다. 중앙정보국은 9·11테러 저지에서부터 실패한 원죄가 있다. 중앙정보국은 9·11테러를 저지른 칼리드 미흐다르와 나와프 하즈미가 알카에다 대원이며 이들이 미국에 입국한 것을 9·11 발생 6개월 전에 파악했다. 중앙정보국은 이를 연방수사국이나 국무부에 알리지 않아, 9·11테러를 방조한 셈이 됐다. 9·11테러 뒤 견제와 균형 없이 중앙정보국에 전권이 쏠리면서 부작용은 훨씬 커졌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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