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21일 수도 하라레의 국제회의센터에서 시민들이 무가베의 사진을 떼어내며 환호하고 있다. 하라레/AFP 연합뉴스
군사쿠데타에도 일주일을 버티던 로버트 무가베(93) 짐바브웨 대통령이 결국 37년간의 장기 독재를 마감했다. 그의 퇴장이 ‘독재의 대륙’ 아프리카에 변화를 몰고올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새로운 독재의 길을 열었을 뿐이라는 비관론이 교차한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21일 제이컵 무덴다 짐바브웨 의회 의장이 국영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무가베 대통령의 하야 결정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무가베는 사임의 글에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즉각적이고 자발적으로 사퇴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52)에게 물려주려다 쿠데타에 나선 군부와 정치권의 탄핵 압박을 받아왔다. 사임 소식에 의원들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고, 수도 하라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자동차 경적을 울리면서 춤과 노래로 환호했다. 무가베의 자진 사퇴로 집권당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 애국전선’ 주도로 개시된 탄핵 절차는 중단됐다.
이번 사태는 지난 6일 무가베가 에머슨 음낭가과(75) 부통령을 전격 경질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반발한 군부가 15일 하라레를 장악하고 무가베를 가택연금시켰다. 그는 지난 19일까지만 해도 사임을 거부했으나 자신과 가족의 면책권과 재산을 보장받은 뒤 자진 사임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무가베의 철옹성 같은 권력이 허물어지면서, 집권 기간이 30년 넘은 독재자들이 여럿인 아프리카 이웃 나라들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주목된다. 지난 9월에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76) 앙골라 대통령이 건강을 이유로 38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 자리를 국방장관에게 물려줬다. 적도기니, 카메룬, 콩고, 우간다, 스와질란드에는 여전히 집권 기간이 30년 이상인 독재자들이 있다.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75) 적도기니 대통령은 1979년 삼촌 프란시스코 마시아스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현존 정치인들 중 최장기인 38년째 집권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에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아랍의 봄’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지난 주말 짐바브웨 시민 10만여명이 퇴진 요구 시위에 나서기는 했어도, 무가베를 몰락시킨 것은 결국 집권 엘리트층인 군부다. <로이터> 통신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프리카연합(AU)이 ‘아랍의 봄’을 의식하며 ‘헌법상 합법적인 선’ 안에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무가베의 퇴진은 절대권력자라도 내부 이반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켰지만, 아프리카의 정치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뀔지는 아직 미지수다.
어쨌든 ‘포스트 무가베’ 시대를 맞게 된 짐바브웨에는 변화의 기대감이 번지고 있다. 일단 음낭가과 전 부통령이 내년 대선 때까지 과도정부를 구성해 임시대통령 직을 맡는다. 대선 이후에도 그가 계속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경제통으로 알려진 그가 37년 철권 통치기간 중 무너진 경제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짐바브웨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149달러(약 125만1000원)에 불과해 최빈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음낭가과가 무가베를 넘어서는 독재자가 될 것이란 추측도 무성하다. 그가 무가베의 재임 기간 내내 짐바브웨 비밀경찰인 중앙정보기구(CIO)를 담당하면서 권력 유지를 뒷받침한 데다, 1983년 남부 소수민족 은데벨레족에 대한 인종청소에 관여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별명인 ‘악어’는 끈질기고 잔인했던 그의 행보를 보여준다.
<시엔엔>은 “한 독재자에서 또 다른 독재자”로 권력이 이양됐다면서, 2010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음낭가과가 무가베에 이어 권력을 잡으면 폭압적 지도자가 될 것이란 두려움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고 전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