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맹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14일 열린 환영식에서 살만(오른쪽) 국왕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리야드/로이터 연합뉴스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장악 지역을 터키가 공격하면서 중동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러시아가 중동 지역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에서 동맹관계를 맺었던 쿠르드족을 버리면서 중동에서 입지가 위축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미국이 빠진 공간을 치고 들어와 중동 국가들과 전방위적인 관계 개선을 추진하며 중재자로 부각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4일 ‘미국의 맹방’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양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 확대와 관련한 경제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는 협정 20여건을 체결했다. 2007년 이후 처음인 푸틴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전날 미국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푸틴은 하루 일정의 사우디 방문에서 살만 국왕과 실력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등 왕실 지도부를 면담했다. 살만 국왕은 “러시아가 중동에서 활발한 역할을 하는 점을 높이 산다”며 “푸틴 대통령과 테러리즘 대처뿐 아니라 중동의 안보, 평화, 경제 성장 등 모든 분야에서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사우디를 좋은 우방이라고 여긴다. 사우디가 관여하지 않으면 중동의 현안 어느 것도 진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며 중동에서 사우디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했다.
사우디는 냉전 시절에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옛 소련과는 적성국 관계였고, 냉전 이후에도 사우디는 중동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러시아와 냉랭한 관계였다. 게다가 러시아는 사우디의 앙숙인 이란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최대 산유국들인 사우디와 러시아는 유가 조정을 위한 양국의 협력이 필요한데다, 중동에서 영향력 확장을 위해 양쪽 모두 외교 다변화가 필요해진 상황이었다.
미국의 시리아 철군에 이은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족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뤄진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중동에서 러시아의 역할 확대를 상징한다. 러시아는 현재 시리아 내전에 관련된 모든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이뤄가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행보와 대조적인 셈이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2015년 러시아군을 파견하며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부를 지원해 내전 승리에 결정적인 노릇을 했다. 게다가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의 동맹이던 시리아 쿠르드족도 미군 철수로 터키의 공격이 임박하자 최근 러시아에 시리아 정부군의 도움과 개입을 요청해 관철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 관계가 악화된 터키와도 관계 개선을 이뤄냈다. 터키는 최근 미국의 반대에도 러시아제 첨단 방공미사일 S-400 도입을 강행했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강화된 봉쇄에 직면해온 이란과도 꾸준히 관계를 개선해, 중동에서 이란-시리아의 아사드 정권-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시아파 연대의 후견인 구실을 해왔다.
여기에 더해 푸틴 대통령의 이번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방문은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인 걸프 지역 수니파 보수왕정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의미한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 앞서 사우디에도 방공미사일 S-400 판매를 제의했고, 사우디도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사우디로서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미국 조야의 압박을 받자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고리로 미국을 역공하는 것이다. 사우디 외무부의 고위관리인 아딜 주비르는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가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믿지 않는다”며 “우리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증진하면서 미국과의 전략적이고 강력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터키의 쿠르드족 공격 사태에서도 중재 역할에 나서고 있다. 크렘린 당국은 이날 터키의 시리아 북부 침공은 시리아의 영토 통합성과 양립하지 않는다며 터키의 조처들이 적당해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터키가 자국 내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투쟁이 확산되지 않게 시리아 쿠르드족을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번 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용인하되, 시리아의 영토 보전성을 해치는 점령 등은 삼가도록 터키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