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정부군의 모술 탈환 작전이 본격화한 2017년 2월, 이라크 특수부대원들이 모술에서 이슬람국가(IS) 전투원(가운데)을 포로로 붙잡고 있다. 모술/AP 연합뉴스
무자비한 테러와 공포 통치로 악명 높았던 이슬람국가(IS)의 최고지도자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가 27일 미군에 쫓기다 자폭하자 누구보다 이를 반기는 이들은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의 주민들이다.
바그다디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27일, 주민 칼레드 왈리드는 “바그다디는 범죄자, 백정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며 “(그가 죽었으니) 모술 시민들은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 한다”며 기뻐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검은색 통옷 차림의 여성 움 알라도 “바그다디는 우리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공격하고 억압하지 않은 집이 단 하나도 없다”며 “이것(그의 죽음)은 모든 이라크인들의 축제다”라고 말했다.
2017년 이슬람국가(IS)가 점령했던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의 탈환전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알누리 대(大)모스크. 위키피디아
12세기 말 이라크 모술에 처음 세워진 알누리 대(大)모스크. 위키피디아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에 있는 모술은 2500년 전 아시리아까지 연원이 닿는 고대 도시다. 이슬람의 정복전쟁으로 복속된 7세기께부터 아랍인, 쿠르드족, 튀르크 족, 아르메니아인 등 주변 민족들이 대거 유입했다. 지금도 이라크 쿠르드족이 밀집해 산다.
21세기 들어 모술의 운명은 가혹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파괴와 약탈 피해를 보았다. 2014년 6월엔 바그다디가 바로 이곳의 알누리 모스크에서 칼리파를 자처하며 이슬람국가를 선포했다. 이후 2017년 7월 미군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 정부군이 탈환할 때까지 3년간 모술은 공포와 죽음의 도시였다.
이슬람국가는 한때 이라크 영토의 북쪽 절반과 시리아 동부 상당 지역을 장악하며, 흡연과 음악까지 금지하는 엄격한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통치했다. 지하드의 적들과 계율 위반자들은 집단 처형하거나 공개 참수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는 이슬람국가의 학살 피해자 수천 명의 주검을 파묻은 집단매장지가 약 200곳이나 된다고 한다.
모술 주민 바샤르 후삼(31)은 “아버지가 핏덩이를 쏟으며 죽어갔다. 그들은 내 눈앞에서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게 강요했다”고 털어놓으며 치를 떨었다. 하니 마무드(54)는 “다에시(이슬람국가) 때문에 세 번이나 쓰러졌다. 그들이 내 집과 자동차를 불태웠다”고 했다.
쿠르드민병대(YPG)의 여전사 조직인 여성수호대(YPJ)의 전투원들. 위키피디아
특히 쿠르드족 소수파인 야지디족은 토착신앙과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가 뒤섞인 민족종교 때문에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집단인 이슬람국가의 박해와 학살의 최대 피해자였다. 이슬람국가 치세 5년 동안 모술과 인근 지역에서 실종된 야지디족 주민만 수천 명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세뇌교육을 받고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여성들은 성폭행과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됐다. 이슬람국가 격퇴전의 선봉에 섰던 쿠르드민병대(YPG)의 여전사 조직인 여성수호대(YPJ)가 2014년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 야지디족 피신 안전통로를 확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쿠르드민병대의 주축인 시리아민주군(SDF)의 대변인은 27일 “바그다디 제거 작전은 쿠르드인의 복수, 특히 야지디족 여성과 인도주의를 위한 복수”라고 말했다고 쿠르드족 매체 <루다우넷>이 보도했다.
그러나 바그다디의 사망이 곧 이슬람국가의 사멸이 아닌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쿠르드족의 지위와 자치 보장을 둘러싼 갈등, 수만 명에 이르는 전쟁 피난민의 귀환,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주민 바샤르 후삼은 <아에프페>(AFP) 통신에 “우리는 또 다른 좋은 소식을 원한다. 집들이 다시 지어지고, 사람들이 일터와 일상생활로 복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