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간 ‘전략 경쟁’과 북한의 ‘핵 무력 완성’이라는 이중 파고가 몰아친 인도·태평양에서 관련국들의 군비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쪽의 무력 증강이 다른 쪽의 대응을 부르는 군비 경쟁의 ‘악순환’이 시작되고 있지만, 신냉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동 속에서 관련국들 사이의 불신의 늪이 너무 깊어 이 흐름을 반전시킬 똑 부러진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5일 이 지역의 엄혹한 정세를 보여주는 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먼저 소식을 전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이날 오전 열차 위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철도의 기동성과 은닉성을 이용해 적의 탐지를 피하는 이동식 미사일 발사 체계로, 옛 소련과 미국 등에서 개발했던 방식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 한국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쏘아 올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충남 태안의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에서 미사일 발사 시험 장면을 참관했다. 이튿날 오전(현지시각 15일)에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를 출범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굳건히 유지해왔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일부 훼손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제공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인도·태평양의 군비 경쟁은 크게 두 개 전선에서 진행 중이다. 첫 번째는 한반도다. 북이 지난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을 성공 발사하며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 한반도에선 2018~2019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됐다. 이 흐름이 장기 교착에 빠지자, 남북 사이엔 어느새 치열한 군비 경쟁이 시작됐다. 북은 지난 1월 제8차 당 대회를 통해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전술무기화 △전술 핵무기 개발 △수중 및 지상 고체발동기 대륙간탄도로켓 개발 추진 △핵잠수함, 수중발사핵전략무기 보유 추진 등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에 맞서 남도 지난 2일 2022~2026년 ‘국방중기계획’에서 △스텔스 전투기(F-35) 도입 완료 △6000t급 차기 구축함(KDDX) 개발 지속 △3000t급 중형 잠수함 지속 확보(도산안창호함 8월 취역) △파괴력 증대된 지대지·함대지 미사일 지속 전력화 등의 조처를 쏟아냈다. 이런 조처가 모두 시행되면 한국의 국방비는 2026년에는 70조원대로 올라선다. 일본 역시 북핵 위협을 내세워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취임한 뒤 8년 연속 방위비를 올려왔고,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직접 타격하겠다며 ‘적기지 공격 능력’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이다.
두 번째 전선은 미-중의 전략 경쟁의 ‘주전장’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진행 중이다. 미국의 올해 국방예산은 7405억달러(872조원)로 2위 중국보다 3~4배 많다. 미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해 말 중국 견제를 위한 예산을 따로 편성했다. 국방 예산안에 ‘태평양억제구상’(PDI) 항목을 신설하고 올해 22억달러(2조6천억원), 내년엔 두 배 이상 많은 51억달러(6조원)를 배정하려 하고 있다. 이 예산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대비 태세를 증진하고 동맹을 강화하는 데 사용한다고 규정돼 있다. 미 인도·태평양 사령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023년부터 2027년까지 227억 달러(26조7천억원)의 예산을 요청하고 있다. 미국은 2024~2045년께 아시아 지역에 그동안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금지해 왔던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계획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지난 2016~2017년 한-중 간 사드 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문이 일 것으로 우려된다.
미 해군 제7함대 소속 유도미사일 구축함 벤폴드호가 8일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 인근 해상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펼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이에 맞선 중국의 ‘군사굴기’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미국을 상대로 강력한 중거리 미사일 전력을 기반으로 한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을 추구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미 항공모함 등 주요 전략 자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을 괌 외곽, 나아가 하와이까지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항공모함을 타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과 극초음속 활공 무기 등 첨단무기 개발에 힘쓰는 중이다. 이 목표를 위해 중국은 1995년 이후 국방비를 14배(미국은 2.7배), 2010년 이후 2.6배(미국은 큰 차이 없음) 올렸다. 3월 공개된 중국의 올해 국방예산은 전년 대비 6.8% 오른 1조3553억 위안(247조원)이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누구라도 중국을 건드릴 망상을 한다면 14억 중국 인민이 피와 살로 쌓아 올린 강철 장성 앞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기적으로 중국의 국방비 지출이 2050년께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오스트레일리아독립연구센터)도 있다. 게다가 중국의 국방예산에는 빈틈이 많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는 자체 분석 모형을 토대로 중국의 2019년 국방예산이 발표된 1조2130억 위안(221조원)이 아닌 1조6600억 위안(302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발표된 것보다 37% 더 많다는 것이다.
미-중 간 ‘전략경쟁’이 격심해지며 미국은 지역의 동맹국들을 활용한 압박도 진행하고 있다.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것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제1동맹’임을 자부하는 일본이다. 일본은 2010년대 중반부터 서태평양에서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다양한 대응을 해왔다. 대표적으로 규슈~오키나와~대만을 잇는 이른바 제1열도선에서 중국 해군과 공군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꼽을 수 있다. 유사시 중국 해군이 서태평양으로 진출을 시도할 경우 이곳에 배치된 일본의 지대공·지대함 미사일들이 중국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가 2만t급 강습상륙함인 ‘이즈모’와 ‘가가’를 경항모로 운용하기로 결정하고, 2018년 12월 각의 결정을 통해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F-35B 42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일본의 두 항모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등에 투입돼 중국 해군과 대치하게 된다. 일본은 1976년 이후 유지해 온 ‘방위비를 국민총생산(GNP)의 1% 미만으로 제한’하는 ‘방위비 1%’ 원칙도 사실상 해제한 상태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은 동맹 및 지역의 안전보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방위력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중국과 대치하는 제1선에서 미-일 동맹을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 오커스다. 오커스의 군사적 의미는 대중국 견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온 오스트레일리아에 일정 부분 핵 능력을 전수해, 남중국해에서 중국 견제에 나서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 핵 비확산 정책을 추진해 온 미국이 스스로 원칙을 깨는 것이어서, 중국의 반발은 물론 주변국의 동요가 불가피하다. 당장,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위해 한-미 원자력 협정의 강력한 개정을 요구했던 한국 내부에서도 실망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중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자체적으로도 지난해 7월 ‘2020 국방 전략 계획’을 발표해 향후 10년 동안 2700억 오스트레일리아달러(231조원) 규모의 국방예산을 편성키로 했다. 2016년 세웠던 계획보다 40% 늘렸다. 해군력 증강에 750억달러로 가장 많이 지출하고, 공군에 650억달러, 육군에 550억달러, 사이버전에 150억달러 등을 쓴다.
이에 맞서 중국은 다시 핵전력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 중국은 현재 6~12척의 핵잠수함을 보유하고 있고, 2030년까지 20여척을 보유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커스의 등장으로 빠르고, 더 큰 규모로 핵잠수함 능력을 늘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의 핵탄두는 350여개로 5800여개의 미국에 크게 뒤지지만, 핵 격납고를 기존보다 10배 이상 많은 200여개 건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내부에서는 그동안 중국이 유지해 온 ‘핵무기 선제 불사용’ 원칙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위협에 시달리며 상시적인 안보 위협에 놓여 있는 대만도 미국산 무기 구매를 늘리는 등 군비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과 경쟁하는 베트남과 인도도 군비 경쟁에 동참하는 기세다.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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