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가 3일 의회에서 논의되는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은 외국이 간섭한 정권 교체 음모라며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발표하는 연설을 수도 이슬라마바드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의회에서 불신임 위기에 처한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포했다. 칸 총리는 자신을 겨냥한 불신임 시도에 대해 우크라이나 전쟁 등과 관련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반대한 자신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및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칸 총리는 3일 텔레비전에 출연해 파키스탄의 민주적 제도에 “외국의 간섭”이 있다며 “나는 의회를 해산하라고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다가가서 총선을 치를 것이고, 국가가 결정하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 야당이 국가를 배신해 정권교체를 꾸미고 있다며 “이런 배신이 전 국민 앞에서 일어나고 반역자들은 음모를 꾸미고 앉았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칸 총리의 요청에 따라 대통령실은 의회 해산을 발표했다. 동시에 칸 총리의 측근인 의회 부의장은 야당이 제출한 정부 불신임의 처리를 거부했다. 불신임안이 제출되면, 칸 총리의 불신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파키스탄 의회는 전날 불신임 안건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부의장은 정부를 바꾸려는 외국과의 “명확한 연계”가 있다며 안건 상정을 거부했다. 야당은 대법원에 정부 불신임안 안건 상정 거부를 무효화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맞섰다.
칸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인 지난 2월23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했다. 그는 9·11테러 이후 미국이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을 비판해왔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아프간 전쟁 교두보로 활용되는 등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뒤에서 탈레반을 후원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갈등을 벌여왔다.
칸 총리는 최근 들어 실각 위기에 몰리자, 야당이 외국 세력과 공모해 자신의 제거하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자신이 러시아와 중국을 반대하는 서구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자신의 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31일에도 미국이 파키스탄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파키스탄 언론들은 칸이 총리직에서 해임되면 양국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미국 당국자의 말이 녹음된 자료를 미국 주재 파키스탄 대사가 칸에게 보고했다 보도했다. 하지만,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칸 총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파키스탄의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 국가 대표 주장 출신인 칸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지난 2018년 부패와 족벌주의 청산을 내걸고 집권했다. 그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파키스탄의 가장 강력한 정치 집단인 군부의 지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권 이후 취약한 의회 기반에다가 인플레이션, 루피화 약세, 정부 부채 문제 등으로 지지를 상실해왔다.
칸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여당인 테릭-이-인사프(PTI)당은 지난 주 연정에 참여했던 7명의 의원들이 야당에 가세해 다수당의 지위를 상실했다. 파키스탄 정치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등 부토 가문이 이끌던 사회주의 성향의 파키스탄인민당(PPP)과 이에 맞서던 우파인 파키스탄무슬림연맹-N(PML-N)에 의해 ‘과두지배’돼 왔다.
결국, 이번 사태는 군부의 입장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군부가 칸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가 군부의 지지 없이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도박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