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부토 귀국길…파키스탄 폭탄테러 왜
강경진압 내몰린 이슬람주의 세력 위기감 커져
부토 귀국전부터 “폭탄으로 환영” 위협 잇따라
강경진압 내몰린 이슬람주의 세력 위기감 커져
부토 귀국전부터 “폭탄으로 환영” 위협 잇따라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를 겨냥한 18일 카라치 폭탄 테러는, 그가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과 형성한 친미·반이슬람주의 연대에 대한 이슬람주의 세력의 ‘반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테러의 배후는 친미 성향의 무샤라프에게 도전해온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추정된다. 1999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는 정권 초기 이슬람주의 근거지인 북서부 부족지역에서 상당 부분 자치를 허용하는 등 이슬람주의 세력에 유화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2001년 9·11 이후 미국이 사실상 이슬람주의 세력을 겨냥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무샤라프 정부가 이런 미국에 협력적 태도를 취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미묘해진다.
파키스탄 북서부의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은 이슬람주의 세력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2001년 미군의 침공으로 실권한 아프간의 탈레반 세력이 대거 은신하고 있으며, 국제 이슬람주의 세력인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도 이 지역에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이 지역은 이슬람주의 세력의 ‘기지’가 되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초기부터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해 왔다. 이슬람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던 무샤라프 대통령은 애초 미국의 요구를 비켜가곤 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세력의 배타적 성향이 최근 외국인, 특히 중국인 대상 테러로 이어지면서 무샤라프의 태도는 돌변했다. 급기야 지난 7월 이슬람주의 세력의 랄마스지드(붉은 사원) 점거 시위에 무샤라프가 정부군을 투입해 무력진압에 나서자, 최근 몇 달 무샤라프와 이슬람주의 세력의 관계는 ‘테러’와 ‘토벌’로 점철됐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이슬람주의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무샤라프의 지지기반은 흔들렸다. 지난 3월 자신에게 비판적인 이프티카르 차우드리 대법원장을 해임하는 과정에서 국내 민주화세력의 반발도 샀다. 급락한 지지율과 거센 야당의 도전에 직면한 무샤라프는 위기를 맞았다.
부토와의 권력분점은 이런 위기상황에서 이뤄진 미국의 ‘지원사격’이었다. 대테러 전쟁 수행을 위해 파키스탄의 정국 안정이 절실한 미국은 무샤라프와 부토가 ‘친미·반이슬람주의’라는 공통점을 갖는 데 주목하고, 둘의 권력분점 협상을 적극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버드·옥스퍼드 출신인 부토는 “우리는 독재와 싸우고 있다. 과격주의자들을 고립시켜 더 나은 파키스탄을 만들겠다”며 이슬람주의 고립을 주장해 왔다. 이달 초 무샤라프는 부토의 부패 혐의에 대한 사면을 단행해, ‘권력 나눠갖기’ 협상이 거의 합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내비쳤다. 부토는 부패 혐의를 면책받자 귀국 준비에 나섰다. 이런 상황이 이슬람주의 세력으로선 달가울 리 없다. 실제 지난주 탈레반 사령관 바이툴라 메수드가 “친미 부토를 자살폭탄으로 환영하겠다”고 경고하는 등 몇몇 이슬람주의 단체들의 ‘암살 위협’이 이미 있었다. 이에 부토는 18일 카라치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난 두렵지 않다.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뿐”이라고 맞섰다. 정부가 보안상 제안한 헬리콥터 귀국도 거절했다. 카라치에 도착해서도 부토는 차량 지붕 연설대의 방탄유리를 거부하고 맨몸으로 환영인파를 만났다. 부토는 19일 한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번 공격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며 “이들의 배후에 (옛 군부 등) 권력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무샤라프도 부토에 대한 테러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음모”라며 강력 비난하는 등 두 사람의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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