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유강문 특파원
특파원 리포트
“89개의 계단을 올라가 높이가 16m인 대문을 지나면 너비와 깊이가 각각 40m이며 창문이 하나도 없는 적막한 방이 보일 것이다. 안에는 앉은키가 10m에 이르는 거인 하나가 살고 있다. 그를 어떤 이들은 구세주라 칭송하고, 어떤 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죄인이라고 욕한다.”
대만 총통 선거가 치러지던 22일 타이베이 시내 ‘민주기념관’에선 ‘민주의 문을 열고 자유의 바람을 쐬자’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해까지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장개석)의 호를 따 ‘중정기념관’으로 불리던 이곳은 천수이볜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직격탄을 맞고 문패를 바꿔 달았다. 1947년 장제스 정부에 항거하다 숨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설립된 ‘2·28재단’이 주최한 이 전시회에는 대만 교육부가 참여했다.
장제스의 거대한 동상은 각종 조형물에 포위돼 있었다. 천장에는 연과 새·물고기·조각배가 주렁주렁 걸려 있고, 벽엔 2·28 당시 희생자의 명단이 먹물로 새겨져 있다. 로비엔 1992년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를 누비던 시위대의 모습을 담은 빛 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한 줄기 백합이 시위대를 굽어보는 기다란 걸개그림 밑엔 “백합은 1년 내내 바닷바람이 부는 척박한 땅에서도 청아한 꽃을 피운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천 총통은 임기 내내 장제스와 싸웠다. 그에게 장제스는 대만의 민주화를 학살한 범죄자이고, 대만의 독립을 가로막은 원흉이었다. 그의 장제스 지우기는 지난해 5월 장제스기념관을 민주기념관으로 개칭하고 건물을 폐쇄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7개월 뒤 민주기념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문을 열던 날 장제스를 숭배하는 국민당 지지자들은 기념관의 붉은 휘장을 찢어내고, ‘천수이볜 타도’를 외쳤다.
천 총통은 2000년 대선에서 민진당 후보로 출마해 국민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대만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였다. 2004년 대선에서도 그는 피격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당선해 민진당 시대를 이어갔다. 1980년대 국민당 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요구했던 선배 세대에 이어 대만의 독립을 제창한 그는 민진당의 이념적 진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줄기차게 대만인들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대만의 정체성이란 화두를 전면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정치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물음은 대만인의 의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나는 대만인’이라는 응답이 늘고, ‘중국인’이라는 대답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대만정치대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대만인이라는 응답이 44%에 이른다. 반면 중국인이라는 응답은 6%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는 5월 퇴임을 앞둔 그에겐 원성만이 쏟아지고 있다. 실정과 부정부패, 무능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국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선거가 그에 대한 심판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국민당은 ‘죽은 역사’보다는 ‘죽어가는 경제’를 생각하라고 그를 비판했다. 민주기념관을 지키던 2·28재단의 한 관계자는 “그가 대만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다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고 말했다.
천 총통은 퇴임과 함께 낙향한다. 그는 이미 고향인 타이난에서 가까운 가오슝에 2300만대만달러(80만달러)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에 앞서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 거처를 마련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그가 이사를 오면 이사를 가겠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열정에 비하면 너무도 차갑다.
타이베이/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타이베이/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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