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6.9 강진에 최소 142명 사망하고 200여명 부상
SNS와 유튜브, 네이버 카페에 올라온 긴박했던 당시 상황
티브이엔(tvN)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의 한 장면과 지진으로 무너진 집에서 망연자실한 인도네시아 롬복섬 주민.
한국인들의 마음을 훔쳤던 작은 파라다이스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습니다.
5일 오후 7시46분(현지시각) 인도네시아 휴양지 롬복섬에서 규모 6.9의 강진이 발생해 최소 142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습니다. 피해는 집계되는 대로 더 커질 전망인데요.
롬복섬에서 배로 10~15분 정도 떨어진 길리섬도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길리섬은 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티브이엔(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진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도네시아 국가재난국은 길리섬과 롬복 북서쪽 산호섬 3곳에서 관광객 1200명을 대피시켰다고 밝혔는데요. 지진 당시 길리섬 한곳(트라왕안)에서만 한국인이 80명 정도 머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네이버 여행 관련 카페에 올라온 긴박했던 지진 경험담을 모아봤습니다. 지붕이 무너진 숙소에서 비키니만 입은 채 도망쳐 나온 관광객부터 쓰나미 공포로 인해 코코넛 나무 위에서 잠을 청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발리섬보다 롬복섬에 인접한 길리섬.
■ 차·오토바이 없는 섬…고도는 불과 60m
<윤식당>을 통해 잘 알려진 길리섬은 메노, 아이르, 트라왕안 3개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트라왕안이 가장 크고 관광객도 제일 많이 찾는데요. <윤식당>은 트라왕안의 북쪽 해변 작은 가게에서 촬영했습니다. 가장 크다고 해봤자 자전거로 1시간이면 일주가 가능할 정도입니다.
길리섬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는 대신 자전거와 ‘치도모’로 불리는 말 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입니다. 생수도 롬복섬에서 배로 공수해야 하고 전기 역시 종종 끊기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불편함에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관광객들이 묵는 숙소와 식당은 해변에, 현지인들의 집은 주로 섬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지진 직후 쓰나미(해일) 경고가 울리자 관광객들이 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쓰나미를 피해 사람들이 올라간 섬 안쪽 언덕의 고도는 불과 60m입니다.
■ “비키니 입고 언덕으로…코코넛 나무에서 잠 청하기도”
길리섬 관광객들은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여러 명이 다쳤다”고 전했습니다. 내진 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단층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잔해에 깔린 사람들이 많았던 탓입니다.
지진 직후 길리섬 피해 상황. 지붕에서 벽돌이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한 외국인 관광객은 지진 당시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며 “갑자기 땅이 흔들려 함께 있던 남자친구에게 ‘지진인가’ 말하는 순간 처음보다 3배 정도 더 강한 흔들림이 느껴졌고 벽에서 텔레비전이 떨어져 나뒹굴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지진은 20초 정도 계속됐는데 숙소 지붕이 무너지고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밖으로 뛰쳐나가 보니 숙소에 딸린 식당 건물이 돌무더기로 변해있었다”며 강력했던 지진 규모를 짐작게 했습니다.
대피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해가 저문 상황에서 지진 직후 섬 내 전기가 모두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신발만 급하게 신고 리셉션으로 뛰쳐나갔더니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행을 찾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쓰나미! 쓰나미!’라고 외쳤고 다 함께 암흑을 뚫고 (섬 안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나는 비키니에 얇은 겉옷을 걸친 채였고, 남자친구는 상의도 없이 운동복 하의만 입고 있었다. 9~10시간 정도 언덕 위에서 떨면서 밤을 지새웠는데 여진이 잇따랐다. 현지인들이 자신들이 마실 물과 옷가지를 건네줘 버틸 수 있었다. 6일 새벽 6시께 숙소로 돌아와 보니 부상자들이 해변에 누워있었고 근처 건물들은 무너져 있었다. 정말 미친 경험이었다.”
또 다른 외국인 관광객은 “몇몇 사람들은 쓰나미가 올까 봐 코코넛 나무 위에 올라가 잠을 청하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울면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곳곳에 보였다고 합니다. 전기는 물론 물이 끊겨 화장실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길리섬 지진 피해 상황. 인스타그램 갈무리
한 한국인 관광객은 네이버 여행 관련 카페에 글을 올려 “식당 입구 쪽에 앉아있다가 땅이 흔들리자 바로 빠져나왔다. 내 뒤에 나오던 사람은 건물이 무너져 깔려있다가 구조됐다”고 전했습니다. 온 거리가 정전이었고 그 역시 “쓰나미가 올까 봐 (사람들과 함께) 언덕으로 올라가 노숙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6일 오후 2시30분 배를 타고 길리섬을 빠져나왔는데 “선착장 오는 길에 섬 안쪽 거리를 보니 담벼락 무너진 곳이 태반이고, 유리가 깨져있었다. 당분간 정상 영업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우려했습니다. 그가 나올 때까지 수도, 전기는 모두 불통이었다고 합니다.
■ 한국인 대다수 섬 떠났다지만…“여전히 혼란”
외교부는 길리섬 트라왕안에 머물던 한국인 80명 가운데 70여명은 이미 롬복섬으로 대피했고, 남은 10명도 7일 안에 모두 대피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다수가 무사히 섬을 떠났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인 관광객 1명이 인파에 떠밀려 다리를 다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길리섬은 산호초가 없는 해안가에 배가 다가오면 승선객이 직접 배까지 걸어가 올라타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길리섬을 떠나려는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길리섬 대피 상황. 인스타그램 갈무리
“아직 길리섬은 혼란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국 시각으로 7일 새벽 4시께 트위터에는 아직 길리섬에 있다는 한 외국인 관광객의 문자 메시지가 올라왔는데요. 그는 여기서 “나는 여전히 대피를 기다리고 있다. 길리섬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마실 물도 없고 누구도 우리에게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다. 섬 대부분이 파괴됐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돼가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이 섬에 남아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1명까지 무사히 길리섬에서 빠져나오길, 부디 길리섬이 지진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