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박물관 전경. 윗쪽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를 경계짓는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이스탄불/신화 연합뉴스
터키가 관광명소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성소피아 박물관을 85년 만에 다시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번 조처는 이슬람주의를 앞세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종교적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유럽연합(EU)과 정교회 등은 유감과 반대의 뜻을 밝혔다.
지난 10일(현지시각), 터키 최고행정법원은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박물관의 ‘지위’를 박물관으로 정한 1934년 내각회의의 결정을 취소했다.
법원은 “성소피아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옛 이름)을 정복한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개인 재산이었다”며 “공화국 수립 이후 술탄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단 소유물이자 모스크로 대중에게 개방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 성격이 모스크로 규정됐고 그 외의 사용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성소피아를 박물관으로 규정한 1934년 내각 결정은 법률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지난 10일 성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서명한 행정명령. 에르도안 대통령 트위터 갈무리
법원 결정에 이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판결 직후 성소피아를 이슬람 사원 ‘모스크’로 개조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에는 ‘소피아 사원’을 터키 종교청이 관리하고 이슬람 신자의 신앙을 위한 공간으로 재개장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동안 기독교회→이슬람사원→박물관으로 역할이 바뀌었던 성소피아는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돌아가게 됐다.
성소피아는 애초 동로마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기 537년 콘스탄티노플에 기독교 정교회의 총본산인 성당으로 건립했으나, 900여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됐다. 400여년 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터키 공화국이 강력한 세속주의를 추진하면서 성소피아는 1934년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런 독특한 역사로, 성소피아는 건축학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 두 문명이 만나는 문화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연간 4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터키 최대의 관광 명소가 됐다. 1985년 박물관이 속한 ‘이스탄불 역사지구’가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앞세운 정의개발당 소속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4년 집권 이후 성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특히 지난해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재선거라는 무리수까지 두고도 집권 정의개발당이 패배한 데 이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기침체까지 겪으며 지지율이 하락하자, 종교적 보수층 결집 등을 위해 성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을 밀어붙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0일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박물관 앞쪽에 무슬림들이 모여 예배를 하고 있다. 이스탄불/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은 유감의 뜻을 밝혔다. 유럽연합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성명을 통해 “현대 터키의 획기적인 결정을 뒤집은 터키 최고행정법원의 판결과 그 기념비적 건축물을 종교청이 관리하도록 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결정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블라디미르 레고이다 대변인은 “터키는 수백만 정교회 신자의 우려를 듣지 않았으며, 법원 결정은 이 문제와 관련해 극도의 세심함을 요구한 모든 요청이 무시됐음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앞서 유네스코와 미국무부도 우려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유네스코 터키 법원 결정 전 <아에프페> 통신 질의에 “세계유산 등재는 많은 약속과 법적 강제를 수반하는 일”이라며 “해당 국가는 특정조치가 해당 문화유산의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1일 성명을 내어 “성소피아는 종교와 전통, 역사의 다양성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의 모범 사례”라며 “모든 사람이 성소피아에 접근 가능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