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이 전쟁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세 단계로 변했다. 첫번째는 ‘거룩한 전쟁’이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악과 맞선 싸움에 한국이 한몫을 맡았다는 시각이다. 옛날 군사정권은 모두가 이렇게만 생각하기를 바랐다. 전쟁의 어두운 면은 덮으려고만 했다. 그다음은 ‘한국 사람도 피해자’라는 시각이다. 참전 군인이 전쟁 후유증을 앓는다는 사실이 1990년대에야 확인되었다. 미군이 뿌린 고엽제에 피해를 본 사람도 많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전쟁 때 한국 사람이 미군한테 당한 피해 역시 알려지며 사회가 들썩였다. 그러다가 1999년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 사람이 피해자였을 뿐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한겨레>는 다른 언론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베트남전을 보도해왔다. 아카이브에서 돌아봤다. 해설 김태권
오직 ‘거룩한 전쟁’이었다
거대한 악에 맞서 한몫했다고
자부심만 느끼던 때가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죽여!”
그런 고함을 쳐야만 했다
중대장은 끔찍한 증언을 쏟아냈다
1992년 5월26일치 <한겨레>에는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던 정아무개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1970년 무더운 여름밤 매복작전 때부터 정씨는 베트남전쟁에 뒷덜미를 잡혔다. 작전 중 옆구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흘러내린 내장을 꾸역꾸역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던 기억을 천형처럼 지니게 된 것이다. 전쟁의 상처는 그의 의식 세계를 할퀴고 갔다.” 요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당시 기사에는 ‘전쟁공포증’이라는 말을 썼다. 결국 1992년 5월15일 “정씨는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숨어라’라며 하수구로 달려갔다가 머리를 찧고는 뇌출혈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정씨는 고엽제 후유증도 앓았던 것 같다. “몸이 가려워지며 발작도 심해져 1981년에는 ‘손이 가렵다’며 불구덩이에 손을 집어넣어 열 손가락의 마디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졌다. 이듬해에는 연탄난로를 감싸 안는 바람에 또다시 몸에 화상을 입었다. 부인 강씨는 ‘이제 와 생각하니 고엽제 때문인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엽제는 멀쩡한 나뭇잎이 떨어지는 독한 약이다. 전쟁 때 미군이 베트남의 정글에 뿌렸다. 사람 몸엔들 좋을 리 없다. 적지 않은 한국 군인이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와 아팠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것이 고엽제 후유증임을 알았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한동안 모른 척했다. 반미 감정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두려웠던 걸까. 1992년이 되어서야 공론화가 되었다.
한편 1994년에는 한국전쟁 때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1950년에 한국 민간인 수백명을 “피난시켜 주겠다”고 모아놓고 미군이 쏘아 죽인 사건이다. 1999년에 미군의 공식 문서를 통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이 무렵부터 베트남전쟁에 대한 시각도 변한다. 1999년 5월 최초로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베트남 사람의 증언이 공개되었다.
1996년 6월13일치 <한겨레21>에는 고엽제 피해를 다룬 글과 사진이 실렸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군인과 그 아들딸 3만여명이 고엽제 후유증에 고통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면을 스캔했다.
이주헌은 <한겨레> 1997년 10월31일치 ‘미술로 보는 20세기’ 칼럼에서 1968년 밀라이 사건을 다룬 미국의 전쟁 반대 포스터를 소개한다. 학살당한 민간인 주검 위로 “아이들도 역시?” “아이들도 역시.”라고 적혀 있다.
9월에 처음으로 <한겨레21>을 통해 의미있는 르포 기사가 나갔다. 르포를 쓴 사람은 당시 베트남 통신원이던 구수정이다. 베트남 호찌민종합대학에 유학하며 1995년부터 <한겨레21>에 현지 소식을 전한 구수정 통신원은 1999년 여름 무려 한달 반 동안 1965~1972년 베트남전 파병 시기 한국군이 작전했던 중부 5개 성을 다니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수집했다. 그 전에는 “베트남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는 영어 전공”, “설날 폭죽 사용 금지령에 주민들 불만”, “한국이나 일본보다 베트남의 젓가락이 훨씬 길어 옆 사람 음식을 집어주는 일이 많다”는 등 베트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재미있는 기사가 많았다. 9월과 10월, <한겨레>는 베트남전쟁 때 민간인 학살 사건과 한국전쟁 때 노근리 사건을 나란히 다뤘다.
구수정 통신원은 1999년 11월13일치 <한겨레>에도 베트남 마을 르포를 실었다. 무기도 없는 베트남 민간인 143명이 총과 수류탄으로 학살당한 뇨럼 사건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가해자가 한국군이었다고 말했다. “뇨럼 양민학살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한국군 양민학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게 베트남 쪽 주장이다.”
<한겨레21>은 “베트남의 양민학살, 그 악몽 청산을 위한 성금모금 캠페인”을 시작한다. 1999년 12월1일치 <한겨레>의 사설은 이랬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정신대 문제 등 과거사 문제가 밝혀져야 한다면, 미국에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과 속죄를 요구한다면, 우리가 베트남에서 한 일들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 질 줄 알아야 한다. 고엽제 등 후유증을 앓고 있는 또다른 피해자인 참전용사들의 상처를 씻는 길이기도 하다.”
반응은 엇갈렸다. 화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99년 11월에 국방부 관리는 말했다. “베트남전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힘든 비정규전의 성격을 지녔다. 우리 병사도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2000년 2월, 월남참전전우 복지회 이사장은 <한겨레>에 썼다. “2만여명의 전우들은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참전전우들에게 양민을 학살했다며 그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을 욕되게 하고 그들의 자손까지 흉악한 전쟁범죄자의 자식들로 몰아가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양민학살자나 전쟁범죄자로 취급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국 사람은 피해자일 뿐, 가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옛날에 우리는 민족주의의 눈으로 역사를 봤다. 한국 사람은 악한 힘센 나라들에 괴롭힘을 당하던 선한 피해자라고만 배웠다. 그래서였을까.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군인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가운데 뇨럼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 가장 먼저 알려졌다. 1966년에 일어난 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뇨럼 마을 사람들은 추모비를 세웠다. 1999년 당시 <한겨레>의 베트남 통신원이던 구수정이 보낸 사진이다.
반면 사실을 받아들이자는 사람도 있었다.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연속보도는 우리 참전군인들에게 30년 전의 악몽을 되새기는 충격과 고통을 느끼게 했다.” 2000년 4월 <한겨레>에 실린 김주황의 글이다. 월남참전전우 사회복지지원회 위원장이던 그는 현지를 찾아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주민들은 34년 만에 한국군이 와서 사죄하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노근리 사건이 근 50년 만에 밝혀진 마당에 이제 우리도 잘못된 전쟁에 대해 베트남 국민에게 사죄와 화해를 구해야 한다.”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은 김기태다. 베트남전쟁 때 해병대 대위였다. “앞서가는 소대의 뒤를 이어 중대본부가 불타는 마을에 들어서자 길바닥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중대장은 무전으로 앞서가는 소대장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죽여!’” 1966년 11월에 한국군이 베트남 프억빈 마을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는 김기태의 증언이 2000년 4월에 <한겨레21> 지면에 실렸다. 끔찍한 사실도 증언했다. “한국군이 귀를 자르고 코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답했다.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 중대원 가운데 한명은 죽은 사람의 눈알을 알코올병에 담아두는 병사가 있었다. 또 한명은 한쪽 귀를 잘라 모아 철사로 꿰어 걸어놓기도 했다.”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베트남 피해 주민들의 증언만 있었다면 반쪽에 그쳤을 것이다.”(2000년 9월 <한겨레21>) 가해자의 증언이 나오자 세계가 관심을 가졌다. 2004년 3월 <한겨레21>에 따르면 “1999년부터 집중 보도한 베트남 기사의 파괴력은 해외 언론들을 움직였다는 데 있다. 베트남 국립문서보관소 문서 발굴, 베트남 중부 5개 성 현장르포, 한국군 참전군인 인터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문서 발굴로 2년 넘게 숨가쁘게 이어진 주요 보도를 베트남의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받아서 보도했다. 그리고 <로이터> 등 통신사들이 세계에 타전했다.”
그러나 증언 이후 김기태는 협박과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머리가 아파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2004년에 <한겨레21>에 털어놓은 회고다.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울리는 전화. 일방적 욕설이 끝나면 전화가 툭 끊겼고, 몇분 되지도 않아 또다시 전화기가 울었다. 집 밖을 나가면 휴대전화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4년 만에 연락이 닿은 그는 “목소리에 활기가 있었다.” 오랜 짐을 덜었기 때문이리라.
김기태의 증언이 실린 2000년 4월27일치 <한겨레21>의 표지. 황상철·고경태가 함께 쓴 기사다. 고경태는 저서 <유혹하는 에디터>에서 “카피는 담담하다. 사진도 담담하다. 어쩌면 특종이기에 그렇게 담담했는지도 모른다. ‘충격 고백’처럼 자극적인 제목은 오히려 좋지 않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퇴역 장교 김기태는 전사한 동료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는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용기 있게 증언했다. 김갑수 소대장의 묘 앞에서 고경태 기자가 찍었다.
한국군 당사자의 증언이 실린 <한겨레21>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베트남 사회에도 충격을 주었다. 1966년에 일어난 학살 사건이 실린 한국의 주간지를 2000년에 베트남 프억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읽고 있는 모습이다. 촬영은 고경태 기자.
이 일로 2000년 6월27일에는 한겨레신문사가 습격을 당했다. 기억하실 독자님이 적지 않으리라. 나도 다음날 신문을 보며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회원 2000여명이 보도에 불만을 품고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건물에 난입해 신문 제작 설비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서류 뭉치에 불을 붙여 사무실 안으로 던져 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술에 취해 자기들끼리도 싸우는 등 아수라장 무법천지를 연출했다.” 이튿날 <한겨레> 사설의 첫머리다.
“회사가 추정한 피해 규모는 거의 1억원 수준. 그렇다고 경제적·사회적 약자인 베트남 참전군인들에게서 배상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쪽에서는 탄원서를 내달라고 간청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한겨레21> 편집장이던 김종구가 2006년 3월에 회고했다. “최학래 당시 사장은 ‘피해 복구는 전적으로 <한겨레21>에서 책임지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속이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한겨레21>이 사태 발생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니 말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김기태의 증언을 받았던 고경태는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같은 소동이 끝난 뒤 한겨레신문사 최학래 사장이 피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회사를 돌아보다가 내 자리로 왔다. 나는 속으로 이런 꾸중을 듣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너 때문에 회사가 이 지경이 됐다’고. 정반대였다. 사장은 나를 툭 치더니 이렇게 한마디 뱉고 떠났다. ‘넌 훌륭한 일을 한 거야.’” 훗날 <유혹하는 에디터>라는 책에 밝힌 일화다.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는 2005년에 이름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로 바꿨다. 나중에는 ‘아스팔트 보수’의 행동대 노릇을 한다. 2009년 6월에 대한문 앞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를 때려부순 것도 이들이다. 지도부 일부는 보수정권의 관제데모에 회원을 대고 이권을 챙겼다. “전우회는 웬만한 중견그룹 뺨치는 문어발식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돈 되는 사업거리가 있는 모든 공공기관이 전우회의 ‘밥’이었다.” 2019년 3월 <한겨레> 토요판 기사다. 이렇게 챙긴 돈을 핵심 간부들이 챙기다가 나중에 비리로 구속되었다. 회원들은 서러웠다. “‘우리 모두 배신당했어요.’ 어느덧 칠십 줄로 들어선 이들의 가슴마다 울분과 회한이 가득하다.” 씁쓸한 이야기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 사회에서, 또 전우회 내부에서, 이들은 가해자이면서 또 피해자였다.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사람들 2천여명이 한겨레신문사를 습격하는 모습이다. 2000년 6월에 김봉규 기자가 찍었으나 공개되지 않았던 ‘비컷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2000년 당시 습격당한 한겨레신문사의 모습. 촬영은 김봉규 기자. 고엽제전우회 사람들이 이토록 거칠게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전쟁에서 자신들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고엽제 피해자로서 배상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 같다.
2009년 6월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를 습격해 철거한 이들은 공권력이 아닌 우익단체였다. 고엽제전우회 사람들이 앞장을 섰다. <한겨레21>은 이 사건을 “민(民)이 민(民)을 직접 타격한 사태”로 보았다. 이종찬 기자가 찍었으나 당시 지면에 실리지 않은 비컷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2004년 12월에 한겨레신문사는 ‘이윤기와 함께하는 베트남 평화기행’ 행사를 벌였다. 소설가로 번역가로 작가로 유명한 이윤기는 베트남전쟁 때 전투병이었다. 베트남은 그에게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땅이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기는커녕 호의를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긴장을 얼마간 풀 수 있었다.” 이윤기의 가슴을 울리는 기행문이 <한겨레21>에 실렸다. “하지만 그들은 화해할지언정 잊지는 않을 것이다.”
2016년 10월 <한겨레21>에는 17년 동안의 취재 뒷이야기가 실렸다. “17년째 한 사건을 좇았다. ‘징하다.’ 30년 만에 기밀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관련 문서와 사진을 입수해 2000년 11월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10여년 뒤 2013년 1월과 2014년 2월 베트남 마을을 다시 취재했다. 2016년에는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을 마련했다.” 오랜 세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취재한 고경태는 “아직도 궁금한 게 많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구수정이다. 지금은 한베평화재단에서 활동한다. 재단은 2017년에 설립되어 ‘베트남 피에타’라는 추모 조각을 베트남과 한국 곳곳에 세우는 사업을 했다.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은 모습의 작품이다. 베트남 쪽에서 이 작품을 부르는 이름은 ‘마지막 자장가’다. “1966년 청룡부대가 남베트남 빈호아에서 자행한 학살로 민간인 430명이 숨졌다. 학살 당시 생후 6개월이던 도안응이아는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의 배 밑에 깔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빗물에 흘러든 탄약에 눈이 멀었다.” 2017년 1월 <한겨레>에 실린 작품의 뒷이야기다.
‘베트남 피에타’의 조형은 어쩐지 낯이 익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조각가 김서경·김운성의 작품이라 그렇다. 작품은 제주에도 설치되었다.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국의 민간인 학살과 베트남전쟁은 하나로 만난다. 한국 사람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 이제는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과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유명한 소설가 이윤기는 베트남 전쟁 때 전투병으로 참전했다. 2005년에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와 <한겨레21>에 여행기를 실었다. 함께 간 고경태가 촬영한 사진이다.
퐁니·퐁넛은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곳 가운데 하나다. 2016년에는 17년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기록전 ‘한마을 이야기-퐁니·퐁넛’이 열렸다. 이 전시를 소개한 베트남 최대 일간지 <뚜오이째>의 지면 사진이다.
‘베트남 피에타’ 동상은 빈호아 학살 때 엄마 품에 안겨 살아남은 아기 도안응이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주 강정마을에도 동상이 섰다. 베트남 민간인학살 피해자들과 제주 4·3사건 피해자 단체 사이에 연대와 교류가 이어진다. 2017년에 김진수 기자가 찍었다.
2017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의 이름으로 ‘길원옥 여성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 첫번째 수상자는 한국 사회에 1999년 최초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을 알렸던, 당시 <한겨레> 통신원이던 구수정이다. 길원옥과 구수정 두 활동가를 백소아 기자가 사진에 담았다.
‘베트남 피에타’를 만든 조각가 김서경·김운성은 한편 ‘평화의 소녀상’의 작가이기도 하다. 2016년 4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두 조각 앞에 꽃을 놓은 뒤 손을 모았다. 김태형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