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87·화국봉). 사진 AP연합
덩샤오핑과 권력투쟁서 밀린 전 중국수석
화궈펑(87·화국봉) 전 중국 주석이 20일 숨졌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화 전 주석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1976년 주석 자리에 올랐으나, 덩샤오핑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81년 축출됐다.
<신화통신>은 이날 저녁 “중국 공산당 우수당원이자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무산계급의 혁명가이며, 당과 국가의 중요 영도 직무를 맡았던 화궈펑 동지가 병으로 치료를 받던 중 낮 12시50분 베이징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도 화 전 주석이 질병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1921년 산시성에서 태어난 그는 농업전문가로 마오쩌둥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71년 마오쩌둥의 승계자로 확실시되던 린뱌오(임표)가 쿠데타에 실패하고 비행기 사고로 숨지자 새로운 후계자로 떠올랐다. 76년 9월 마오쩌둥이 숨진 이후 당과 중앙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았다. 당시 그는 “화궈펑에게 중국을 맡길 수 있어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유언을 무기로 정치국을 장악했다.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은 장칭(강청) 등 이른바 ‘문혁 4인방’ 제거 때까지 덩샤오핑과 손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뒤 덩샤오핑은 자신의 개혁·개방 노선에 화궈펑을 걸림돌로 여기고 차츰차츰 밀어냈다. 화궈펑은 1980년 총리직을 자오쯔양(조자양)에게 내줬고, 이듬해에는 당과 군사위 주석에서도 물러나 결국 집권 5년 만에 권좌를 내놓는 신세가 됐다. 다만 사법처리나 구속 등의 물리적인 조처를 당하지 않았음은 물론, 2002년 11월까지 당 중앙위원직을 유지하면서 과거 마오쩌둥 시대의 ‘숙청’ 문화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 리즈 대학 중국학과의 델리아 대빈 명예교수는 <아에프페>(AFP) 통신 인터뷰에서 화궈펑이 “충분히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마오의 후계자가 되기엔 미흡했다”며 “얌전한 방식으로 숙청된 셈인데, 결국 슬픈 인생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화궈펑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사실상 칩거하면서 대외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오쩌둥의 생일인 12월26일과 기일인 9월9일이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기념관을 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화궈펑은 자신을 몰아낸 실용주의자들이 지난 30여년 동안 개혁 개방을 바탕으로 이뤄낸 중국 경제성장에 대해 공식적으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김외현 기자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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