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국 60돌 용의 승천] ② 되살아나는 마오쩌둥
* 중국의 붉은별 : 마오쩌둥
* 중국의 붉은별 : 마오쩌둥
중국 남부 장시성의 징강산에서 창사행 버스를 타니, 차창 옆으로 절벽이 스치는 내리막길을 40여분 달려서야 평탄한 길이 처음 나타난다. 버스는 이후에도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후난성과의 경계를 지나 산과 강을 끼고 무려 11시간을 달렸다. 1927년 창사에서 추수봉기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잔당을 이끌고 징강산으로 숨어들던 길은 지금도 험했다.
창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오의 고향 사오산으로 향했다. 창사에서 남쪽으로 110㎞, 고즈넉한 마을 사오산엔 마오의 생가를 순례하는 이들의 발길만이 분주했다. 지난해에만 360만명이 이곳을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사오산이공학원의 한 학생은 “마오쩌둥 주석 만세”를 외쳐대며 연신 오성홍기를 흔들었다.
작년 360만명 생가 순례
기념품 1200억원어치 팔려 마오는 공산혁명을 향한 대장정 끝에 신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을 일으켜세웠다. 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공산당 창당식에 참석한 13명 가운데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드라마다. 1934년 국민당 군대에 쫓겨 368일에 걸친 대장정을 마쳤을 때 그가 이끌던 홍군은 출발 당시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8000명이었다. 마오는 1949년 건국 이후에도 험로를 걸어야 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경제는 파탄의 경계를 넘어서 있었다. 자본가들이 공장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산업기반은 붕괴를 거듭했다. 특히 인플레이션은 살인적이었다. 상하이에선 반년 남짓 사이에 물가가 무려 20배나 뛰었다. 마오는 이른바 ‘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경제 부흥에 나섰다. 공산혁명에 참여한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혁명의 주력군이던 농민을 건국의 선봉대로 내세웠다. 1952년 말 중국 경제는 공산정권 수립 이전의 최고 수준을 회복했다. 힘이 난 마오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개조에 착수한다. 농촌에선 토지의 집체소유를 기반으로 한 인민공사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백화제방’ 운동을 일으켜 공산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도 허용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으로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깨부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참여가 너무 뜨거웠다. 공산당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고조되자 마오는 1957년 이른바 ‘반우파 투쟁’을 촉발해 공산당의 지도력을 부정하거나 비판한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불순분자로 가혹한 심판대에 세웠다. 마오의 경제정책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에 나서자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한다. 마오는 ‘사회주의 모국’ 소련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대약진 운동’이라는 자력갱생 노선을 선포한다.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력, 석탄, 석유, 철강 등 중공업 분야에 투입됐다. 마을마다 용광로가 들어서 숟가락과 밥솥 등 거의 모든 쇠붙이를 빨아들였다. 열기에 휩싸인 마오는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까지 따라잡겠다고 호언했다. 문화대혁명 등 과오 불구
‘사회주의 이상’으로 평가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혹독한 노동과 열악한 분배에 절망한 농민들은 조직적인 태업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1958년부터 3년 동안 흉년이 이어졌다. 도처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벤자민 양은 당시 대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어림잡아 3000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59년 루산에서 열린 당 지도부 회의에서 마오는 공개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마오는 “여러분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군을 조직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오는 결국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이른바 실용주의자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서 권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인내할 수 없었던 마오는 경제가 회복되자 반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훗날 이 문화대혁명을 대약진 운동과 함께 마오의 과오로 규정한다. 1966년부터 그가 숨진 1976년까지 중국은 암흑기로 빠져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주자파로 몰려 쫓겨났다. 홍위병은 자본주의의 유제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지식인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우상으로 살아 있다. 초상화에서 흉상, 시계, 라이터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한 기념품은 언제 어디서나 중국인들의 일상을 지켜본다. 지난해 사오산에서 팔린 마오 기념품은 6억5300만위안(1200억원)어치에 이른다. 그가 대장정 도중 회의를 열어 권력을 장악한 구이저우성의 준이와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 수도로 삼았던 산시성의 옌안에는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창춘에서 버스를 빌려 징강산을 찾은 왕린은 “마오쩌둥 주석이 중국을 만들었다”며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했다. 마오의 사회주의 개조는 개혁개방 과정에서 확대된 소득불균형과 지역격차에 대한 대안으로 부활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이 그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인민본위와 사회적 격차 해소를 강조하는 후진타오의 이른바 ‘과학적 발전관’은 그가 시간을 넘어 존재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중국 좌파들의 논단인 ‘우유즈샹’(烏有之鄕)의 판진강 대표는 “사회주의는 몰락한 것이 아니라 발전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며 “마오는 사회주의의 영원한 이상”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징강산 사오산/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기념품 1200억원어치 팔려 마오는 공산혁명을 향한 대장정 끝에 신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을 일으켜세웠다. 1921년 상하이에서 열린 공산당 창당식에 참석한 13명 가운데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드라마다. 1934년 국민당 군대에 쫓겨 368일에 걸친 대장정을 마쳤을 때 그가 이끌던 홍군은 출발 당시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8000명이었다. 마오는 1949년 건국 이후에도 험로를 걸어야 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르면서 경제는 파탄의 경계를 넘어서 있었다. 자본가들이 공장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산업기반은 붕괴를 거듭했다. 특히 인플레이션은 살인적이었다. 상하이에선 반년 남짓 사이에 물가가 무려 20배나 뛰었다. 마오는 이른바 ‘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경제 부흥에 나섰다. 공산혁명에 참여한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토지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혁명의 주력군이던 농민을 건국의 선봉대로 내세웠다. 1952년 말 중국 경제는 공산정권 수립 이전의 최고 수준을 회복했다. 힘이 난 마오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개조에 착수한다. 농촌에선 토지의 집체소유를 기반으로 한 인민공사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백화제방’ 운동을 일으켜 공산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도 허용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으로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깨부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참여가 너무 뜨거웠다. 공산당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고조되자 마오는 1957년 이른바 ‘반우파 투쟁’을 촉발해 공산당의 지도력을 부정하거나 비판한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불순분자로 가혹한 심판대에 세웠다. 마오의 경제정책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에 나서자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한다. 마오는 ‘사회주의 모국’ 소련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대약진 운동’이라는 자력갱생 노선을 선포한다.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력, 석탄, 석유, 철강 등 중공업 분야에 투입됐다. 마을마다 용광로가 들어서 숟가락과 밥솥 등 거의 모든 쇠붙이를 빨아들였다. 열기에 휩싸인 마오는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까지 따라잡겠다고 호언했다. 문화대혁명 등 과오 불구
‘사회주의 이상’으로 평가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혹독한 노동과 열악한 분배에 절망한 농민들은 조직적인 태업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1958년부터 3년 동안 흉년이 이어졌다. 도처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벤자민 양은 당시 대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어림잡아 3000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59년 루산에서 열린 당 지도부 회의에서 마오는 공개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마오는 “여러분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군을 조직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오는 결국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이른바 실용주의자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서 권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인내할 수 없었던 마오는 경제가 회복되자 반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훗날 이 문화대혁명을 대약진 운동과 함께 마오의 과오로 규정한다. 1966년부터 그가 숨진 1976년까지 중국은 암흑기로 빠져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주자파로 몰려 쫓겨났다. 홍위병은 자본주의의 유제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지식인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우상으로 살아 있다. 초상화에서 흉상, 시계, 라이터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한 기념품은 언제 어디서나 중국인들의 일상을 지켜본다. 지난해 사오산에서 팔린 마오 기념품은 6억5300만위안(1200억원)어치에 이른다. 그가 대장정 도중 회의를 열어 권력을 장악한 구이저우성의 준이와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 수도로 삼았던 산시성의 옌안에는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창춘에서 버스를 빌려 징강산을 찾은 왕린은 “마오쩌둥 주석이 중국을 만들었다”며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했다. 마오의 사회주의 개조는 개혁개방 과정에서 확대된 소득불균형과 지역격차에 대한 대안으로 부활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이 그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인민본위와 사회적 격차 해소를 강조하는 후진타오의 이른바 ‘과학적 발전관’은 그가 시간을 넘어 존재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중국 좌파들의 논단인 ‘우유즈샹’(烏有之鄕)의 판진강 대표는 “사회주의는 몰락한 것이 아니라 발전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며 “마오는 사회주의의 영원한 이상”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징강산 사오산/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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