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민족주의’ 우려 자료열람도 제한
“아시아 제1의 의협” 열광·찬양은 옛말
“아시아 제1의 의협” 열광·찬양은 옛말
“갑오 중일전쟁 이후 본세기 초에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중국과 조선 인민의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동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한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의 이 평가는 지금도 중국인들의 안중근에 대한 존경을 상징하는 말로 남아 있다. 1919년 5·4 운동시기에 그와 아내 덩잉차오는 톈진 난카이대학에서 <안중근>(또는 <망국한>)이란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중화제국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있던 1909년 10월26일, 일본 제국주의의 지도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 의거는 중국인들을 열광시켰다.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였던 장타이옌은 “아시아 제1의 의협”으로 칭송했고, 개혁사상가 양계초는 “다섯 발자국에 피 솟구치게 하여 대사를 이루었으니 웃음소리 대지를 진감하누나. 장하다 그 모습,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글을 남겼다.
당시 중국 전역의 신문과 잡지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신속히 보도하고 사설 등을 통해 그의 항일 애국정신을 찬양했다. 지난 1년 동안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당시 중국 신문에 실린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와 사설 400여편을 모아 <중국인 마음 속의 안중근>을 펴낸 서명훈 하얼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의 연구를 보면, 베이징의 <정종애국보>는 ‘한국에 사람(인재)이 없다 말하지 마라’는 제목으로 그의 의거를 보도했으며, 당대 중국인들은 안중근의 의거가 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뒤 안중근은 ‘민족주의자’로서 금기시됐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학자들을 중심으로 안중근 연구와 그를 기리는 작업이 다시 시작됐지만,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다시 난기류가 흐르고 있다. 신장 우루무치의 위구르족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해진 중국 정부가 안중근 기념사업이 조선족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안중근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국장은 “지난해 티베트와 올해 신장 우루무치 사건 이후 소수민족 문제에 중국 정부가 매우 예민해졌다. 올해부터는 중국에서 안중근 관련 자료를 열람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하얼빈/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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